가출 / 김휴
단단히 봉한 계시록이 도착했지만 아득한 신전을 끌어내리려 비가 쏟아진다 그때 상심한 시도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스스로 문장이 된 비는 잠들지 못하고 나비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제 기억에 블라인드 처리를 원하던 아이는 비의 심리에 그날의 소문을 자막처리 중이다 창밖을 중얼거리는 나비의 알몸에서 가출을 위한 사다리타기를 하고 싶었지만 여백을 내어 주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손목시계에 사는 벌레는 하염없이 기억을 거부하고 잇몸에 사는 벌레는 이별을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고 맨 뒷자리에서 비는 화장을 고친다 초록칠판에 구름을 띄우고 비와 나비의 그 짓에 습한 웃음을 깔아주었지만 털컹대는 빗소리는 짜릿하지 않고 가출의 주기가 조심스럽다 아래로 흐르는 것은 순정이 깊다 습기와 헤어진 저녁을 후회하며 눈을 내다버린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해서 제 머리를 쥐어뜯다가
생리대가 없어요
작은 입술 한 장만 돋게 주세요
라면도 못 먹었어요
시집 『물을 연습 중이다』 . 59쪽. 현대시학사.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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