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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38) / 낙랑 고분(樂浪古墳)의 대난굴(大亂掘) 시대

문근영 2017. 3. 5. 10:23

<한국 문화재 수난사>(38) /

 낙랑 고분(樂浪古墳)의 대난굴(大亂掘) 시대



1970년대 초에 중국 대륙의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한 고분에서 약 2,100년 전의 한나라 문물이 쏟아져 나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 발견은 1968년에 하북성의 만성에서 발굴된 유승 묘(劉勝墓; BC 2세기 말의 서한시대)의 경이로운 금루옥의 등에 이어서 한 문화의 전모를 재확인시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 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출토 유물은 1909년 이후 북한의 평양 근교 대동군 대동강면을 중심을 발굴된 낙랑 고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낙랑은 전한의 무제(武帝)BC 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의 하나였던 관계로 그 옛터의 고분 출토 유물은 한 문화 것이 중심이었다. 그것들을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반도 침략과 더불어 처음으로 조사·발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눈부신 유물 내용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그러자 예외 없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 무법자들이었다.


190910, 일제의 강청에 따른 한국 정부의 위촉으로 두 번째 고적 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는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 1880~1959),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1888~?)라는 두 조수를 대동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그 때 그들은 <평양일보>의 일본인 사장이었던 사라카와로부터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숱하게 군집해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세키노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그 중의 2기를 골라잡고 내부를 알아보려고 당장 시굴에 들어갔다.


막연한 기대를 갖고 고분의 시굴을 지휘하던 세키노는 전(; 벽돌)으로 현실을 꾸민 속에 한나라 문화의 거울을 비롯해서 무기며 토기 등이 부장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2천 년 전에 아주 놀라운 문화를 누리고 있던 한민족이 이주해 살았던 낙랑시대의 고분 유적지, 그리고 완전히 잊혀 졌던 한 문화의 지하 보고,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뒤에 가서 밝혀지지만 평양 근교와 황해도 쪽에 걸치는 낙랑 고분은 수천 기에 이르고 있었다.


세키노의 조사팀은 다음해 가을에도 2기의 낙랑 고분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출토시켰고, 191110월에는 세 번째의 조사 발굴이 사리원 근처에서 실시되었다. 대방 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과 당토성(唐土城)으로 불리던 곳에서 대방군의 치지로 생각되는 토성이 이때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또 19139월에 가서 진남포 부근과 봉산군의 유적 및 고분을 조사·발굴하여 한대의 와당·복식품·동기·도기·칠기·옥석기·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획득했다. 그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출토품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실어 갔다.


19124, 동경제국대학 공학부에서는 건축학과가 마련한 한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다. 3실의 <조선지부>에 처음으로 진열·공개된 낙랑 고분 출토 유물이 주목의 초점이었다. 다음은 당시 일본의 고고학 잡지가 소개하고 있는 그 때의 전시 유물이 내용과 명확한 반출 경위이다.


세키노 조교수와 야쓰이, 구리야마 일행이 조선에서 3회에 걸쳐 가져온 것으로 너무도 풍부하여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지적하면 낙랑시대의 고분 지역인 대동강면 상오리 석암동 발견의 한경, 오주전, (시루), 당토성 발견의 전, 봉산군 미산면 오상동 발견의 ‘使君帶方太守張撫夷(사군 대방 태수 장무이)란 명이 있는 묘전, 안학궁지(安鶴宮址) 발견의 고와, 강동 한 왕묘 발견 유물 등이다.”


1912년의 동경제국대학의 공대의 조선 고대 유물 전시장에는 낙랑 고분과 유적지에서 출토해 반출해 간 유물들 외에도 경북 고령의 대가야 왕궁지와 고분에서 학술 조사를 빙자하여 세키노 등이 파 간 기왓장과 토기들, 진주에서 발굴한 고분 부장 유물, 경주 부근의 서악동에서 발견했다는 돌베개, 작은 신라 불상 6, 신라 고와전 500, 강화에서 도굴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고려 중엽의 유명한 문신이었던 이공수(李公遂)의 무덤을 도굴해서 꺼낸 석관, 묘지, 동경, 나전 공예품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동경대학 공대에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 고적 도보> 1에서 그 때의 불법적인 반출 유물인 동경, 무기, 팔지, 반지, 오주전, 옹기, 주발, (대동강면 석암동의 낙랑 고분 출토품) 등 일부를 사진 도판으로 확인할 뿐이다. 이 도판 유물들은 <조선 고적 도보>에 사진으로 소개될 때 벌써 동경제국대학 공대 소장품이라고 기정사실화시키고 있다.


세키노는 1909년의 고적 조사(낙랑 고분 기타)가 한국 정부의 위촉에 의한 것이었다고 마치 순수한 요청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뒷날의 조사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형식에 불과했다. 그때는 이미 일제 세력이 한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고적 조사를 위촉하여 필요하면 마음대로 고분도 파고 유물도 일본으로 실어갈 수 있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소위 통감부의 정략의 하나였다. 그에게 절차상 합법적인 유적 파괴와 유물 약탈 및 불법 반출을 허가한 한국 정부의 명목상의 부서는 탁지부였다. 그러나 당시 탁지부의 사실상의 실권자는 아라이 겐타로(荒井賢太郞)라는 일본인 차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경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에게 한국 전역의 사적을 조사케 하자는 입체적인 침략 계획의 하나를 기안한 자가 바로 그 아라이 차관이었다.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로는 물론 저들 마음대로였다.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국보 89호







세키노가 인솔하는 정식 발굴대가 평양 근교의 대동강 남쪽(대동강면)에서 낙랑 고분 10기를 발굴하여 예기치 못했던 굉장한 유물들과 이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장품들을 출토시킨 것은 191610월의 일이었다. 이 때 발굴된 10기의 고분에는 제1호에서 제10호까지 번호가 붙여졌는데 현재 국보 89호의 금제 교구’(국립 중앙박물관 소장)는 그 때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이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센세이셔널한 발견은 동시에 낙랑 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는 소문을 낳게 했고, 이어서 무법자들의 도굴 행위가 걷잡을 수 없이 성행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대동강면 일대의 낙랑 고분을 지하의 정창원(正倉院; 일본의 유명한 고대 동양 미술품 보고)’이라고 부르며 너도 나도 그 속의 임자 없는 보물을 꺼내 가지려고 덤볐다. 한 일본인이 뒷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6년에 세키노 박사 일행이 대동강면의 낙랑 고분을 발굴하여 수 백점의 귀중한 부장품을 출토시킨 후로 낙랑 유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민간에도 퍼져 1922년쯤에는 개성 부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무리들이 낙랑 고분에 눈을 돌려 도굴을 일삼더니 19241925년에 이르러서는 최악의 난굴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얘기다. 세키노가 낙랑 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도굴과 약탈은 이미 시작됐었다. 세키노의 조사 보고에 그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그는 조사 초기에 이미 야마다라는 평양 거주의 일본인이 수집하고 있던 도굴품들을 보았고, 얼마 후에는 그가 낙랑군지라고 추정한 지점에서 “‘樂浪太守章(낙랑 태수장)’, ‘䛁邯長印(염감장인)’ 같은 글자가 새겨진 귀중한 봉니가 발견(도굴)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또 그 무렵에 평양의 복심원 검사장이었던 세키구치란 일본인도 朝鮮右尉(조선우위)’라고 새겨진 봉니를 토성리에서 입수해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인 무법자와 악질 수집가들이 직간접으로 도굴하고 혹은 뒤에서 조종했던 낙랑 고분의 상상을 넘은 대난굴 시대는 1923년께부터 4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한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에서 우리는 그 때의 놀라운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대난굴 시대가 전개되는 바람에 평양(일본인 사회)엔 별안간 낙랑열이 전염병처럼 만연되면서 낙랑의 명성을 천하에 울리게 되었다. 그 무렵 당국의 취체는 오늘(1934년 현재)과 같이 엄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관계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고분에서의 출토품(도굴품)을 일반인에 앞서 다투어가며 점유하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꿈같은 시대로서, 대정 1314(19241925)께엔 평양 시민(물론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말)으로서 낙랑 고분의 출토품에 12원을 주고 고경 1장이나 토기 항아리 1개쯤 사 갖고 있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있다.”


앞의 증언자는 또 계속해서 당시의 구체적인 싱태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심한 경우는 관립 학교의 선생이 백주에 당당하게 수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구분의 봉분 한 복판을 위로부터 파들어 가서 눈부신 부장품들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일품들이 자연 민간 수집가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도굴자들이 평양의 수집가에게만 팔다가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어디를 어떤 경로로 연락했는지 경성·교토 방면의 호사가(수집가)들과 줄을 대고는 도굴품 중 일품은 그 쪽으로 몰래 빼돌려 평양의 수집가에게서보다 두세 배의 보수를 받았다.”(핫타 쇼메이(八田蒼明), <낙랑과 전설의 평양>, 1934)


일본인 중간 상인과 교사자에게 매우 혹은 유혹되었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조선 사람은 그들의 불법적인 도굴 행위가 경찰에 적발이라도 되는 날엔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호되게 곤욕을 당하곤 했다. 반면 배후의 일본인인 붙잡혀 처벌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실태는 192682일에 열렸던 총독부 고적 조사 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도굴하도록 유인하고, 그 짓을 사주하는 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직접 발굴한 소민을 처벌해야 한다. 발굴한 소민만 벌함으로써 그 범죄주인 자가 오히려 벌을 면하는 것 같은 사례가 만일 사실이라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방과 중앙(서울)의 권력층 수집가들과 항상 접선하고 있던 악질적인 배후의 일본인 범죄주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도굴 행위와 자금 조달은 1천 수백 기의 낙랑 고분에서 부장품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대규모의 유물 약탈이었다.


뒷날의 한 조사 보고는 1,400기의 낙랑 고분 가운데 도굴을 면한 것은 약 140기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참한 대난굴 시대에 얼마나 많은 귀중한 유물과 국보급 문화재들이 출토돼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쾌한 수수께끼이다. 다만 다편적으로 당시의 몇몇 중요한 도굴품이 기록과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하나는 세키노가 1923년에 소개하고 있는 전한시대의 유물인 영광 3년명’(BC 41)의 동종(동체의 지름은 약 40cm)이다. 당시의 소장자는 평양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도리카이였다.


192210월 중순에 평양 근교의 대동강 건너편인 선교리(낙랑 고분 지역)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일본인이 가로채 가졌다가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던 평양중학교 교장인 도리카이에게 가져왔다는 경위였다. 그러나 세키노는 그 얘기를 액면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 동종의 발견자인 중국인 인부가 뒤에 또 동종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깨진 거울을 도리카이 교장에게 갖고 왔다고 하여 역시 중학교에 진열하고 있었으나 과연 어느 곳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들인지 알 수 없다.”(전한 영광의 3년의 동종, 1923)


BC 41년에 주조된 전한시대의 진귀한 보물이었던 영광 3년명 동종의 입수 소장자 도리카이는 당시 일본인 자제들만 다니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장이었다. 이 중학교에는 교장 외에도 낙랑 고분의 출토품들을 탐욕스럽게 취득하여 도굴을 조장시킨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기타무라라는 자였다. 그는 한때 평양의 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도굴품 장물아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랑 고분의 부장품이 바닥이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계획적으로 수집 혹은 직접 도굴했던 천금의 장물 컬렉션 보따리를 안고 유유히 평양을 떠나갔다.


일본인 가운데 교육자라는 자가 이 판이었다. 그가 바로 야다(핫타 쇼메이)<(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증언하고 있는 구체적인 도굴 일화의 하나인 백주에 당당하게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 속의 눈부신 부장품들을 약탈하곤 했던 관립학교 선생”, 그 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못된 일본인 교사는 비단 기타무라만이 아니었다.


야다는 또 그의 회고기에서 낙랑 고분 대난굴 시대의 평양의 일본인 수집가(사실은 장물아비들)였던 도미다, 모로카, 하시도, 나카무라, 오무라, 오노, 나카니시, 오카모도, 야마다, 세키구치 등의 대표적인 명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밖에 1934년 현재 수집품을 몽땅 감추어 갖고 깨끗이 평양을 떠나버린 자로서 앞의 평양중학교 교사 기타무라와 평양여학교 교장이었던 시라카미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야다는 또 평양고등학교의 교장 얘기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자제를 수용하는 중학교였으나 교장은 역시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인 교장도 낙랑 고분의 한대 유물들이 마구 도굴되어 나올 무렵에 이른바 수집가들 사이에서 자그마치 1만 원이라는 거액을 호가한 거섭 원년명 화문경을 단돈 1원에 입수했다.


그 밖에도 그는 BC 3세기에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진나라 때의 무기인 과()와 한대의 녹유박산향로’, ‘녹유항아리등 고고학적으로 너무나 귀중한 도굴품들을 입수하고 있었다.


거섭 원년은 서기 5년에 해당된다. 1925년 가을에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 등이 총독부의 발굴·조사 계획에 따라 평양 근교에서 23기의 낙랑 고분을 학술적으로 조사·발굴할 때에 연호명이 있는 칠기가 발견되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관계 전문가들을 흥분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는 거섭 3년명’(서기 8)의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고분에서 화문경 하나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명문은 없었다. 따라서 평양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입수해 갖고 있던 도굴품 거섭 원년명의 화문경은 그만큼 최고의 고고학적 가치를 갖는 유일한 유물이었다.


그 존재가 알려지자 수집가 사이에서 1만 원을 호가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한 평가가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우매하고 가난했던 발견자(현지 주민이 우연히 출토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런 일이 흔히 있었다.)는 그런 것을 가져오도록 유인했을 일본인 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갖고 가서 단돈 1원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모든 도굴품은 필연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점거되던 시대였다. 세키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1925) 이후 도굴이 성한 결과, 다수의 무기·동기·도기류가 발견되어 대부분은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사가의 손에 들어갔다.”


세키노는 그 중 중요한 것의 하나로 평양의 아무개가 소유하고 있던 서기 9년명의 칠기 파편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재명칠기의 최신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당시의 불법적인 도굴품 범람과 뒷거래의 실정을 알려주고 있다.


토민들의 도굴품을 일본인 호사가들이 다투어 매수하는 바람에 갈수록 도굴은 장려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평양에 갔을 때 그런 출토 유물(도굴품)을 보았는데, 그 수량이 굉장할 뿐 아니라 그 중에 진기한 것이 적지 않음에 놀랐다.”(<낙랑시대의 고분>, 1926)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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