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37)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도난 사건

문근영 2017. 3. 3. 08:44

<한국 문화재 수난사>(37)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도난 사건









해인사(海印寺)에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 팔만대장경판10여 장이 분실되어 있었다.”


196910월에 서울과 지방의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중대한 뉴스였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조사를 위촉받았던 서수생(徐首生) 교수와 조명기(趙明基) 박사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54년 만에 처음으로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이었는데, 그 내막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관리당국과 학계는 미처 알지도 못했던 사실에 모두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된 분실 경판은 18장이었다.


그러나 이 분실 숫자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또한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도둑을 맞았는지 정확한 내막은 이미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과거의 총독부 기록 하나가 뒤에 색출되었다. 19371220, 당시 해인사 주지 장제월이 미나미 지로(南 次郞; 1874~1955) 총독에게 <국보 및 사찰 재산 도난 보고의 건>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면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년 828, 당사가 안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 판목 전부를 만주국 정부의 의뢰로 탑탁(인출)함에 있어 허가를 상신했던 바, 본년 911일부로 본부(총독부)의 인가가 내렸기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다카하시 도루(高橋 亨; 1878~1967) 박사와 지휘 밑에 인경 공사를 실시할 제, 당사 소유 국보 고려대장경 판목 및 당사 소유 재산 귀중품이 도난 되었음을 발견하였음. 도난당한 날짜는 미상임.”


그리고 뒤에 도난당한 경판명을 적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1, ‘대장엄경론(大莊嚴經論)’ 1, ‘대장경 목록(大藏經目錄)’ 1, ‘석교분기원통초(釋敎分記圓通鈔)’ 1장으로 돼 있다.


앞의 도난 보고를 받은 총독부에서는 다음 해인 1938225일부로 경남 도지사에게 해인사 대장경판(당시 보물 111)과 기타 귀중품 도난의 전말을 상세하게, 그리고 시급히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 뒷조사 보고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으나 그 때 도난당한 경판 4장이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에 확인된 ‘18의 분실 경판은 그 4장을 포함한 숫자로 생각되는데 나머지는 그 뒤에, 아니면 같은 무렵에 모두 도난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37년의 팔만대장경인경 때엔 두 벌을 떠서 한 벌은 평북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때의 대대적인 작업장(경판고) 경비 책임자는 해인사 지구 경찰관 파출소였다. 이 파출소의 주임은 전부터 악질 순사부장으로 유명한 일본인이었다. 과거의 총독부 고적 조사 서류철에 입각하여 현지에서 청취된 증언은 1937년의 경판 및 귀중품 도둑이 바로 그 자였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인경 현장을 보호·경비한다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얼씬대던 순사부장이란 자가 그 경판들이 보통 보물이 아닌 것을 알자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8천 장도 넘는 산더미 같은 경판들 속에서 4장쯤 슬쩍 빼 가진들 누가 알랴 싶었는지도 모른다. 뒷날 누군가가 그 자의 집에서 목격한 바로는 훔쳐 온 4장의 대장경판을 일본식 4각 화로(소위 이로리)의 외곽으로 붙여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것이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도 없다(또 다른 증언을 빌리면 그 때의 범행자가 가야면의 다른 순사부장이었다고는 한다.).


돌이켜보면 1915년에 총독부에서 오다 등 7명이 해인사에 파견되어 팔만대장경판에 대한 첫 조사를 했을 때 결판이 18장이었고, 뒤에 그것을 보각하여 채운 것으로 돼 있으나, 그것들도 그전에 일본인 무법자들이 훔쳐 갔었는지도 모른다.


불상, , 동종할 것 없이 사찰 문화재가 일본인 악당들에게 닥치는 대로 약탈되던 한일합방 전후의 무법시대에 해인사의 대장경을 노린 자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의 팔만대장경판을 최고의 보물로 일본인 사회에 알린 조사 보고가 1910년에 이미 간행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짙다. 무라야마(村山)라는 일본인이 경위를 알 수 없는 <해인사 대장경 조사 보고>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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