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新羅 眞興王 拓境碑)

문근영 2016. 10. 22. 08:29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新羅 眞興王 拓境碑)




전경


보호각






비문


지정 번호; 국보 33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만옥정공원

지정일; 19621220

시대; 신라 진흥왕 22(561)

분류; 석비

내용;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빛벌가야[非火伽倻; 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이곳을 순수(巡狩; 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이 척경비는 본시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록(火旺山麓)목마산성(牧馬山城, 사적 65)에 있던 것을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555(신라 진흥왕 16)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이듬해에는 대야주(大耶州; 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화강석제로 최대의 높이 1.78m, 최대의 너비 1.75m, 두께 약 0.3m이다. 비는 비각 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비는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 덮개돌)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석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1면을 간 다음 외연(外緣)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다. 비문은 27행인데 1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끝 행은 3자뿐이고 오른쪽 윗부분은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으므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과 같이 순수의 사적과 수행한 사람의 열기(列記) 등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인명관직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 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며, 해서체로 자경은 4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전반부는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비를 세운 시기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二月一日立(신사년이월일일립)’으로 미루어 대가야(大伽倻)가 멸망하기 1년 전인 561(진흥왕 22)으로 이 지역을 가야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특기 사항;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 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 행정 조직, 신분제 및 사회 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