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손
최호일
조용한 손은 조용하다 어제의
약사는 약을 조제하느라 상처를 건드릴 뿐 조용하다
일요일의 거짓말처럼
약국에는 어제의 약이 없다
문틈으로 끼어든 정적도 정적 때문에 고요하고
끼어들 틈이 없다
두 번째 꽃집이 길을 건너오고 있다
모든 골목은 각별하고 추운데
사람들은 개처럼 첫눈이 오는 걸 좋아한다
눈송이가 머리를 만지고 걸어다닌다
주부들은 주부가 되기 위해 바쁘다 말없이 그릇을 깰 때도
그릇을 깨지 않을 때도
개와 주부 사이에 조용히 눈이 온다
소년들은 소녀의 예민한 손으로 빚어 만든 얼굴로 웃는다
잠시 너를 놓쳐야 할 텐데 만져야 할 텐데
내 소리를 받아 줘
개와 주부와 소년은 눈으로 뭉쳐 만든 시간인데
모두 옷을 입고 있을 뿐인데
손으로 약을 잡았으나 눈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손이 나를 놓고 있는 것 같다
—《시인수첩》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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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 1958년 충남 서천 출생. 2009년 《현대시학》신인상을 통해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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