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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빨강의 이름으로 (외 2편) / 김박은경

문근영 2016. 4. 21. 05:17

빨강의 이름으로 (외 2편)

 

   김박은경

 

 

 

전쟁 중인 수용소 하늘에서

립스틱이 비처럼 쏟아졌다니

다 죽어가던 여인들이 살아났다니

밥도 아니고 옷도 아닌 그것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컴컴한 바닥

오물을 딛고 담요만 걸친 채로도

빨강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니

 

살기 위해 벌레를 잡아 삼키는 빨강과

핏기 가신 입술에 부들부들 바르는 빨강과

뭉개 바른 입술 벌린 채 눈 못 감는 빨강까지

 

입술이 입술인 것을 잊지 않을 때

심장이 심장인 것을 잊지 않을 때

지금은 지금인 것을 잊지 않는다

 

말없는 아가리를 열어젖혔다

주먹을 날려 터뜨렸다

손톱을 세워 발라냈다

생생한 것들이 피어났다

시간을 삼켜 거침없이 낳았다

 

지겨운 중음(中陰),

넌 끝이다

 

 

 

바늘 끝

 

 

 

내게 당신을 꿰어줘

당신이 쉽도록 내 몸은 거대하고

당신에게 꼭 맞도록 내 몸은 다시 좁을 거야

 

좁은 몸이 뚫고 들어가는 좁은 문으로

현실과 가상의 서사가 이어질 때

쌓인 시간들과 밀려오는 시간이 이어질 때

단단하다 믿던 바닥도 놀라 움찔하겠지

 

한 구멍 뚫을 때 한 구멍씩 메워지니

텅 빈 데 없이 매끈한 위로

바수어진 기억들 하나도 흘리지 않고

물처럼 흘러 시내 강물 큰 바다에 가닿으니

기쁨과 아픔 같은 거 다 함께 찰랑거릴 거야

 

선명한 표면을 직통해서

불안한 배후에 닿는다는 건

한술의 밥이 삼킨 삶과 죽음 같은 것

 

다할 때까지 한 땀씩

살아 있는 한 끝까지

간다, 가고 있다 하면서

 

안개처럼 가없는 덮음이

어리고 시린 것 위로 내려앉는 거 본다

한순간도 바늘 끝 놓지 않고

전부를 건다

 

 

 

중독

 

 

 

처음이라는

진짜라는 영원이라는

거짓이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9회 말이라는 마지막이라는

역전이라는 희망이라는

중독, 이건 스도쿠 게임

한 칸에 하나씩의 수(數)만 쓸 수 있으니

물구나무 자세로 차가운 고요를 내쉬었다면

끓어오르는 치욕을 들이마실 순서

천국과 지옥을 함께 준대도 좋아,

좋아서 8자 춤을 춘 거라면

준비된 파국을 짓씹는 순서

하루 같은 일생을 살아왔다면

일생 같은 하루를 견딜 순서

 

이 완벽한 결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어 이토록 기이하게 허튼 짐승,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귀 기울여 들을수록 퇴화해가니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울고 조금 웃는다

 

 

 

                           —시집『중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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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은경 / 서울 출생. 숙명여대,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업. 2002년 《시와 반시》에 「감전」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중독』. 사진산문집 『홀림증』.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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