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리고기를 구울 때
김도언
당신이 지하철에 지갑을 두고 내릴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가수로부터 사인을 받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애완견의 항문낭을 짤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병원에서 늙은 의사의 촉진을 받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낼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백화점 안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초등학교 동창과 혀를 핥으며 키스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피아노 앞에서 잇단음표 두 개를 놓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동생의 생일 케이크를 사기 위해 제과점에 갈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소설의 첫 문장을 고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후쿠오카로 가는 항공권을 알아볼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베고니아 이파리에 손을 뻗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영화를 보며 울고 있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모텔의 숙박료를 흥정하는 애인의 등 뒤에 서 있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깎은 발톱을 어디에 버릴지 고민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샤워를 하고 머리카락을 말릴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웃고 있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아무도 몰래 늦은 점심을 먹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택시기사로부터 희롱을 당할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당신이 손톱에 자주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을 때
나는 오리고기를 굽고 있었다
—《시인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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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1999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악취미들』『랑의 사태』등. 장편 『꺼져라, 비둘기』로 제6회 허균문학작가상 수상. 2012년 《시인세계》신인상 당선으로 시단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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