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올바른 독서 / 조 율

문근영 2016. 3. 30. 02:19

올바른 독서

 

  조 율

 

 

가능하면 나는,

그 남자에게 나를 잃겠습니다.

환불교환 가능한 백화점 영수증 첨부된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선물 대신

아무도 사지 않는, 역마살처럼 옮아간

그 남자의 푸르뎅뎅한 사랑,

오래전 이사 온 집의 번지수처럼 아득한,

그 남자 등초본 속 이름 한 권 분양받겠습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남자라고 읽겠습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으며 남자 이마에

남모르게 천천히 밑줄을 긋고는 킥킥,

그럼 맘 모르는 그 남자 따라 꺽꺽.

읽을 만큼 읽고 또 지치도록 읽겠습니다.

그 남자 가슴 첫 페이지에서 끝 페이지까지,

진부한 머리말에서 당신도 모르는 호적 간기면까지,

혹은 발톱 거스러미에서 정수리 상처까지

이윽고 남자를 다 읽는 그날이 온다면.

그럼 난 그 남자 손 붙잡고 동인천

후미진 헌책방 셔터 앞 어딘가에 내다 버리거나

아니면 가장 가난한 헌책들만 사는

책방도 뭣도 아닌 것 같은 난쟁이 지붕 집

사립문 열고 들어가 헐값에 팔겠습니다.

 

먼지 쌓인 감옥에서 누렇게 늙어가는 그 남자,

이제 정말 아무도 사 가지 않는 그 남자,

염소밥으로도 너무 낡아버린 그 남자.

누군가의 한때였던 아련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고.

몸속 은밀한 어딘가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네잎 클로버를 부적처럼 품으며 행운을 기다리다가

당첨된 로또번호처럼 그 남자, 마침내 알 수 없이

죽으면.

가능하면 문상은 가지 않겠습니다.

 

 

                   —《현대문학》2013년 5월호

-----------

조율 / 1983년 인천 출생.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시 「적도」당선. 

* 간기면 : 판권면(版權面). 출판물에서 그 제호나 서명·저작자·발행인·발행일자 등에 관한사항이 표기되어 있는 면. 간기면(刊記面)이라고도 한다.

 

 

  적도

 

    조 율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 부근쯤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
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내려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구인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속에서
적도는 옆구리 뜨거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에 엉킨 오르막길을
왜 이렇게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 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 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 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대,


 

                 _ 2013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 : 김규린 시인)

 

* 김규린 시인(본명 김지연) : 1968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199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나는 식물성이다』(1999 문학과지성사),『열꽃 공희』(2011 천년의 시작). 현재 제주대학교 국문과 출강 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