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진평왕릉(眞平王陵)
전경
전경
전경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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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정면
표지석
표지석
주변 숲
•지정 번호; 사적 180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지정일; 1969년 8월 27일
•시대; 신라 진평왕
•분류; 능
•내용; 경주 진평왕릉은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동의 평지 가운데에 있는 신라 26대 임금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동쪽으로는 명활산성(사적 47호), 서쪽으로는 낭산(사적 163호)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진평왕은 본명이 백정(伯淨 또는 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다음으로 재위 기간이 길어 54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이 수・진나라 등에 왕래하였고, 수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 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 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 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신성(사적 22호), 593년에 명활산성을 축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한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 급인 것은 분명하다. 지정 면적은 4만 3,722㎡[약 13,249평]이다.
진평왕릉은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무덤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호석(護石;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특기 사항;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 진평왕은 신라 26대 임금으로서 성은 김씨, 이름은 백정이다.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이 화백 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579년 8월에 즉위하였는데 키가 11척[약 3m 30㎝]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전한다. 진평왕이 얼마나 거구였는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루는 자신이 세운 내제석궁(內帝釋宮)이라는 절에 갔을 때였다. 돌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진평왕이 발을 내딛자 체중을 견디지 못한 섬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진평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라고 했다. 그 후로 성 안에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때 부러졌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진평왕이 즉위한 해의 어느 날 천사가 대궐의 뜰에 내려와 “하늘에 계신 상제께서 왕에게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천사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이 꿇어앉아 공손히 옥대를 받으니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로 진평왕은 큰 제사 때마다 이 옥대를 둘렀다고 한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침입하려고 계획하며 신하들에게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니 신하들이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 황룡사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세 가지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의 왕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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