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못
서윤후
1.
우리는 아직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은 동생
2.
고요한 교실
투명한 햇빛에 흩날리는 먼지 바라보다
철제 필통을 떨어트렸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귀가 빨개졌다
간밤에 깎은 연필들이 부러졌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흰 종이 앞
화분에서 길 잃은 꽃말처럼
나는 나의 이름을 외웠다
3.
내가 자주 가는 연못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물방개 튀어 오르고 담가도 혼나지 않을 깊이, 연못을 잊은 사람들은 오랜 잠수 시합을 하고 있거나 저수지에 갔을까 바다가 되기엔 담가야 할 발목들이 부족한 이곳은
내가 자주 오던 연못이었다
4.
눈에 흰 천을 두르고 숨바꼭질 했다
아이들이 박수 치며 여기야, 아니 저쪽이야
귓속말로 내게 바람처럼 불어왔다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술래가 바뀔 차례인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다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을 뿐
5.
손을 갖다 대면 온도계는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직 나에게 남은 에너지
집에 가는 길엔 모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빨개진 귀는 누가 물들이는 걸까 두 뺨 붉게 달아오르는 나란한 거리에서 발생된 체온
6.
나는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처럼
책상 밑에 숨는, 아직은 작고 연약해서
이불이 너무 커 밤새 이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창문 밖에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
연못처럼 조용한 성격에
내일의 연필을 깎아줄 수 있는 솜씨를 지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손뼉 치고
여기야, 바로 여기에 있어
숨은 적 없이 숨어 있게 된 방 안
죽은 손목시계는 멋으로 차고
고장 난 태엽을 돌리며 나는 오랫동안
나를 맴돌았다
7.
초인종 누르지 않고도 찾아드는 은인들에게
연못은 바다보다 더 어려운 둘레
물속에 목마른 사람을 위한 건배
풀이 죽은 동생이
죽은 따옴표로 흰 접시를 채웠다
밥을 먹을수록 말수가 사라지는 동생
이 병신아
소리 없이 우는 건 누가 알려줬냐고
멱살을 흔들던 그림자가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것도
입지도 벗지도 않은 채 낱낱이
나의 연못에 온 첫 손님이었다
—2014년 4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문장웹진》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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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2009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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