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참나무를 읽다
김현희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 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세 꺾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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