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통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시집『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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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바람소리, 이끼 낀 바위와 숲속 햇살의 조화 속에 나무 끝에서 푸른 물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면 알알이 수줍게 열매 맺힌 산초나무를 낮은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산초는 여러 증상의 한방 약재로 쓰이지만 추어탕에 넣어먹는 향신료로 귀에 더 익은 식물이다. 추어탕을 다 끓인 다음 먹기 직전에 비린내를 없애고 맛을 좋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실은 비싼 산초가루보다는 제피가루(초피나무의 열매가루)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생김새가 비슷한 것 말고도 둘 다 잎과 열매에서 특이한 향이 나고 줄기에 가시가 있는 등 변별이 쉽지 않다. 나무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향의 차이나 잎을 보고 구분이 가능하고 가지에 난 가시를 보고도 판단한다고 한다.
암수 한 나무에 돋아있는 산초나무 가시는 어떤 의미인가? 사랑을 ‘비열한 소통’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왜 하필 산초나무를 거들먹거리는가? 사랑이 그토록 비열할 수 있단 말인가. 파란 잎과 향기를 가진 ‘너, 산초나무’를 사랑하는 ‘나’는 ‘너’에게 날마다 한 통의 물을 길어 나르고 울타리 밖의 햇살을 끌어다 주었지만, 너는 나를 찌를 ‘은밀한 가시’를 자기 몸에 키우며 내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을 잔인하게 배반하고 기만한다. 이때 사랑의 소통에는 ‘가시’가 숨어 있고, 그래서 사랑은 ‘비열하다’는 말이 마땅찮지만 성립된다. 그런 비열한 사랑에 대해 '나’는 차라리 장렬하고자 한다. ‘장렬하다’는 것은 사랑의 비열함과 비루함을 스스로 껴안고 옥쇄하는 자세의 다름 아니다.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너를 사랑하는 일은 처음부터 엄청 위험한 일이었다. 그 위험을 알고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랑은 장렬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열렬한 사랑은 원초적으로 비장하다. 자신의 파멸초차 사랑의 대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참혹의 청법이다.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얼얼한 '고독의 음악'이란 말인가. 영혼을 관통하는 격정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산초의 그 신열 같은 아찔하고 아득한 사랑. 그러나 상처는 아픔만은 아닌, 어쩌면 사랑의 본질일수도 있는 것, 아픔까지 사랑의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것. 살로메에게 고백한 것처럼 눈을 감고도 볼 수 있고, 귀를 막고도 들을 수 있으며, 입이 없어도 그대를 부를 수 있는 소유가 아닌 존재방식의 릴케식 사랑법이 아닌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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