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기린의 목은 갈데없어 / 이병일 / 제16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문근영 2015. 5. 15. 08:01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이병일

 

 

  기린의 목엔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지 그러나 강한 것은 너무 쉽게 부러지므로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지

 

  기린의 목은 뿔 달린 머리통을 높은 데로만 길어 올리는 사다리야 그리하여 공중에 떠 있는 것들을 쉽게 잡아챌 수도 있지만

 

  사실 기린의 목은 공중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중이야 쓸데없는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 거야

 

  그때 태연한 나무들의 잎눈은 새벽의 신성한 상처와 피를 응시하지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고 있지

 

  저만치 무릎의 그림자를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기린의 목과 목울대 속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의 숨을 주시할 때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유연하고 믿음직스럽게 아름답지 힘줄 캄캄한 모가지 꺾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까

당선작 외 2편

진흙여관

  숙박부 속을 뒤집는다 해도 이 진흙여관 일부가 썩어간다 해도 삶은 멱살잡이를 할 수가 없다

 

  진흙여관엔 흐르는 시간 따위는 없다 미끈한 것들이 악취가 나도록 뒹굴지만 정작 몸과 뼛속은 차가워진다

 

  붕괴도 낙상도 없어 헛짚는 생각마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다 처참히 봄의 꽃나무들이 무너질 무렵 진흙여관은 점점 물가 쪽으로 기운다

 

  가장 더럽고 추한 곳이 진흙여관인데, 물정 모르는 것들이 텅 텅 빈 수렁의 방을 가꾼다 때로는 컴컴한 헛간도 징후가 없이 웅덩이 냄새를 키운다

 

  침 범벅의 아가미들이 진흙여관에서 다시 떠날 힘을 얻듯 그렇게 진흙 외투를 입고서 산란기를 견딘다

 

 

풀피리

 차갑고 푸른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든 심심한 피리도 좋지만 그것보다 나는 대책도 없이 그냥 논두렁에 앉아 저녁을 불어 재끼는 풀피리가 좋았다

 

  하지만 풀피리 속으로 들어간 물비늘과 희고 푸르고 선명한 뱀눈나비의 알과 꾀죄죄하게 꼬리가 노랗게 빛나는 까치독사의 춤을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

 

  풀피리 부는 남자는 다름 아닌 이방인, 찔레꽃 그늘 붉게 흐트러지고 낮에 내온 새참 바구니의 밥알들, 나물반찬들 쉬어터지고, 막걸리 병에 뜬 무기력증이 터질듯하게 부풀고 있는데

 

  풀피리 소리는 이 논두렁에서 저 산모롱이 길로 건너간다 산중턱의 외딴 절집으로 간다 들길을 훤히 알고 있는 어스름과 함께 간다 풀피리를 따라간 가뭄과 홍수도 있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물방개들이 더러운 진흙 냄새를 좇아 논물로 모여드는데 죄를 벗어버린 허물에서 나온 허름한 여자가 저 풀피리의 둥글고 따듯한 음계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모질고 독하게 생긴 풀잎을 뜯어 아랫입술과 윗입술에 끼어 바람을 불어넣으면 서럽게 빛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음악을 좇아 나온 뱀을 잡아 아버지는 황소에게 먹이고 여름을 날 준비를 했다

 

 

[심사평]

서정시란 어떤 대상을 빌려 내면 고백, 즉 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대상의 선택과 출현, 내면 고백은 하나로 자연스럽게 빚어져야만 한다. 한 시인의 어법을 빌리자면, “나는 뱀을 빌려 고백하겠다. 나는 뱀의 성질이 아니라 뱀의 모양을 빌릴 수 있다.”(김행숙, 『사춘기』) 대상과 표상의 적합성이 이루어질 때 시의 깊이도 생성된다. 그러니 시의 대상을 선택하는 찰나 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40여분의 작품들이었다. 저마다 다채로운 개성으로 시적 진경에 가 닿았기에, 그걸 한 편 한 편 읽어내는 일이 즐거웠다. 최종심에서 다뤄진 시들은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가막조개」, 「꽃마리」, 「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방식」, 「사랑하는 이에게」, 「미안의 피안」 등 여섯 분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에 비해 상당히 높아서 놀랐다. 다들 시의 기본을 충실히 다진 단단한 시편들이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시를 써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기대되었다. 그중에서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외 작품을 낸 응모자가 빼어났다. 처음 시를 읽을 때 왜 하필이면 기린일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지만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에 대한 상상력은 단박에 독자를 아프리카 고원으로 안내한다. 기린은 강하기보다는 따뜻한 피와 살을 가진 연약한 짐승이다. 그 길고 아름다운 목을 가진 기린이 사는 아프리카 고원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엄연하고 “덫과 올가미”들이 널린 곳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고원이 먹고 먹히는 정글 법칙이 엄연한 신자유주의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자본 논리가 판치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탈바꿈할 때, 우리 심사자들은 이 시인의 솜씨에 감탄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한 「진흙여관」, 「풀피리」, 「녹명」 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 독창적 발상, 사물에 대한 해석력, 능란한 시행의 배열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빼어난 시편으로 수주 문학상을 수상한데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고형렬, 장석주(글)

출처 : 수천윤명수시인과함께
글쓴이 : 수천/윤명수&짝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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