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 외 4편
유안나
저수지가 여자를 밀어내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엎어진 여자를 누군가 바로 누이자 귀와 코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그때 잠깐 구름 사이로 햇빛이 넘어왔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무상으로 잉태된 눈부신 햇살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과 이마를 가렸다
누군가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 입술을 반쯤 열고 흰 치아가 드러났다
흰빛의 블라우스 맨 밑의 단추를 채우지 못하여 속옷이 드러난 배가 가슴보다 불룩했다
속이 허할 때 꾸는 꿈이 고였으리라
두근거리며 부풀렸던 꿈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에 모아지는 동안 수많은 말이 가지처럼 출렁거렸다
귀와 귀를 건너가는 동안 누구는 그것이 사인이라 하였고
누구는 또 다른 의혹을 바람처럼 무럭무럭 키웠다
누군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젖이자 오뚝한 콧날 위로 다 감지 못한 초점 잃은 눈이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점점 자라는 의혹이 재미있다는 듯 동공의 배경에는 짙게 흘러가는 구름을 깔고
시신이 수습되고 소나기가 한차례 퍼부었다
저수지에서 수많은 혀가 거세게 돋아났다
구름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비누 거품이
나를 태우고 떠올라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통으로 구름이 데리러 왔나 봐요멈출 수가 없어요
당신을 불러와야겠어요
습진 돋은 손바닥으로 당신의 고귀한 비늘을 더듬으면
어느새 떨어지는 근엄한 표정의 구름이 쫙 어제처럼 깔리겠지요난 이제 나도 모르게 당신의 가슴을 후빌지도 몰라요
어쩌면 당신의 심장으로 파고 들어갈지도 몰라요
우심방과 좌심방을 들락거리며
당신의 피를 역류하게 할지도 몰라요
리모컨의 작동버튼을 지워버릴지도 몰라요
나더러 햇살이 되라고 노을이 되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모르죠
식탁에서 당신이 지구본을 돌릴 때
나는 외간남자와 블루스를 추어요
불온한 아이를 낳을 거예요 당신이 기르겠죠
평등이라 부르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변덕이 심한 여자
더 이상 나를 불러들이지 마세요
끔찍했던 나의 계절은 지났어요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우산이나 준비하세요
나는 좀 더 쉬다 갈거예요
함평 댁
말캉하고 순하게 엎드려 있는 땅
약손을 감추었다 내밀듯 손가락 같은 싹이 올라온다
호미질하는 함평 댁
끙끙 앓다가도 새싹 올라오는 걸 보면
아픈 것도 싹 잊는다
함평 댁 호미로 푸른 싹을 돋우어 주고 있다
흙으로 무엇을 그리 조심스럽게 덮어주느냐고 물어보자
귀에다 속삭인다
자식들 줄라고 작년에 심은 더덕 뿌리인디
큰 소리로 말하믄 쥐가 듣고 다 파가 버린께
크게 말하믄 안되어라우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냐고 묻자
부모는 자식 보고 잡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고샅을 내려다보지만
자식은 어디 그런다요
바람이 휙 지나가며 말 속에 구멍을 뚫는다
돌팔매를 맞은 듯 산꿩이 운다
자식 안 굶기는 그 맴으로 이날 평생 살었지라
맴만큼 갈치지 못해서 항상 미안허요
허리를 토닥이며 일어서는 그녀
등이 낫처럼 굽었다
백야
바다가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네요
사연이 사연을 몰고 와 바다의 등짝은
자꾸만 자꾸만 휘청거리네요
엄마 엄마 보세요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환한 울음을요
생의 마지막 역린처럼 해의 잔광이 일어서고 있어요
저 쓰러질 듯한 몸짓은 오래전 누군가의 뒷모습 같지 않나요
속눈썹에 붙은 엄마의 눈알이
지도 밖에서 튀어나와 꿈틀거려요
그래요 엄마의 지도는 와룡마을이 전부였죠
엄마는 이참에 아빠와 언니의 눈동자까지 몰고 와
내 속눈썹에 단단히 올라앉아요
나는 당신들의 눈동자를 속눈썹에 올려놓고
사람들을 집들을 나무들을 잠들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지요
보세요 만년설이 옷을 벗네요
무겁고 낡은 옷을 갈아입네요
벗은 옷을 산 아래로 던지자
한때의 무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군요
나를 쫓아온 내 아비의 뼈들도
구름 속에서 배회하다 달려나와 빠르게 춤을 추네요
나는 그 모든 것을 눈썹에 붙이느라 눈꺼풀이 내려앉아요
그래서인가요 한밤에도 지지 않는 해는
엄마와 내게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하고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가지요
비행기 한 번 못 타보고 지구 밖으로 밀려 난 엄마
저 풍경들을 꼭꼭 눌러 담아 보내드릴게요
엄마 엄마 보세요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환한 울음을요
들리나요 엄마, 이토록 가느다란 어둠의
실. 핏. 줄.
58년, 금자씨
금자씨의 다리는 한쪽은 짧고 한쪽은 깁니다
어느 다리가 정상적인 다리인지 모르지만
뒤뚱뒤뚱 어디든 잘 다닌다고 합니다
금자씨의 집은 고층아파트 맞은편 달동네
일찍 달이 떠서 빨리빨리 자고 열심히 일하라고
달동네라고 아랫 동네 사람들은 부릅니다
몇 해 전에 금자씨 노모가 중풍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고층아파트가 생기면서
바람의 통로를 막아서 병이 들었다고도 합니다
사람이 적당히 바람도 맞고 볕도 잘 받고 해야
병도 안 생기고 무병장수한다고 입방정을 떱니다
뭐, 사람이 화초도 아닌데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씨부리고 자기집 화분이나
관수 잘 하라고 금자씨 악다구니 쳤습니다만,
절뚝거리는 금자씨 다리도 알고 보면
바람이 안 통해서 짝짝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후후! 맞는 말 같다는 생각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금자씨 재봉틀 하나로 이 달동네의 반세기를
오리고 자르고 재단하며 꿋꿋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다리 아작나는 지도 모르고 폐달을 밟았습니다
없는 집에 늦게 시집 와 지지리궁상으로 살았지만
열다섯 달덩이처럼 순한 아들 하나 있고
이십 년 된 재봉틀처럼 손발 달달거리는 노모가 있어
한 세상 살만하다고 자랑질 그칠 줄 모릅니다
금자씨의 다리는 한쪽은 짧고 한쪽은 깁니다
자고 일어나면 고층아파트는 삐죽삐죽 올라가고
어떤 다리가 원래부터 있던 제 다리인지 모르지만
어디든 뒤뚱뒤뚱 잘 돌아다닙니다
땡깡쟁이 노모도 밥 잘 먹고 똥도 잘 싼다고 합니다
중학생 아들도 공부 잘 하고 속 썩이는 일 없다고 합니다
전자 우편 : annaryoo@naver. com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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