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상반기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신인상 당선작
측백나무의 방 (외 2편) / 신단향
측백나무 가지가 늘어져 방을 만들었다 처진 커다란 가지를 들추고 들어가 보면 사람이 쉬었다 간 따뜻한 흔적이 있다 그 따뜻함을 비밀처럼 베고 아랫목인 듯 뒹굴어 본다 가지와 푸른 잎들이 사방을 가려 더욱 나를 정답게 품어 아늑했다
갓난 동생에게 떠밀려 찬 문풍지 소리에 아랫목으로만 파고들던 어린 시절 이불 속에 발을 다독여 주던 어머니 싸늘하던 어린 발의 체온이 솜사탕처럼 녹던 아랫목으로 측백나무 이파리가 떨어져 내린다
천근 내려앉는 눈꺼풀이 방문을 열 때 스치는 숨결, 누가 방안에서 놀다 달아나는가 더운 숨결, 아랫목이 달아나버린 방 따뜻한 곳이어도 더욱 싸늘하고 납처럼 무거워진 혀가 오그라든다
측백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떨어져 흘러내린다 측백나무 뿌리 위로 어머니 손길이 돋아난다 어디든 몸 누이면 그곳이 아랫목, 마른 가랑잎 바스락대는 측백나무 방에 잠들고 싶어서 측백나무의 빈 방을 구멍 난 문풍지 사이로 바람이 들여다본다
디스크, 디스코
거리의 물살을 힘차게 가로지르던 몸에 바람이 들었다 흑백 X레이에 찍혀진 척추, 목과 허리가 어긋나서 삐걱거린다 뼈와 뼈 사이에서 바람이 불 때, 기우뚱 하반신이 펄럭인다 말없이 모니터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의사, 뼈들이 세상 밖으로 내뱉는 말들을 듣는다 제각기 이빨을 앙다물고 밀폐된 어둠을 밝힌 뼈들에게 마우스로 안부를 묻는다 관을 헤치고 나온 수세기 전의 미라처럼 곡선만으로 드러난 살갗을 밀치고 뼈대들이 제 모습을 내민다 통증이 오던 부위를 의사가 짚는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열려 있거나 희미하게 나타나는 곳 디스크라는 병명이 몸의 곳곳에서 디스코를 춘다 저릿저릿하게 팔다리를 흔들며 디스크는 신이 났다 골수가 빠져나간 자리마다 모래바람 소리. 모래 위를 걸어가는 낙타의 숨결이 열기를 내뿜는다 숨가쁘게 달음질치던 연골들, 어둠 속에 갇힌 몸속의 뼈들 앞으로 곧은 자세 흑백의 내가 걸어 나온다 희고 빛나는 화면 속 뼈들이 환하게 웃는다 통증이 삭제된 화면 속 세상에서 밝은 외출을 나선 것이 당신의 첫 외출이었던가 새들이 날개를 치며 내게 묻는다 어둠에 갇혀있는 뼈들이 웅성거린다 의사의 처방전 속 고장 난 뼈들이 그림자처럼 스며든다 내 몸집 한 채의 기둥이 통닭 한 마리의 뼈다귀와 다를 게 없으므로 퇴화되어 가는 날개 속에 허공 한 채 들어선다.
몸꽃
내 우듬지에도 봄바람이 지나는가
입춘이 되니 살갗에 화색이 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연록의 풀잎이 돋아나는지 풀 대궁같이 매끈해진다
건조한 땅이 갈라진 것처럼
메마른 흙먼지 일으키던 땅이 촉촉해져
봄은 아직 서성이는데
말간 수액이 우듬지 곳곳을 간질인다
앙상한 가지 위에 핀 꽃이 아름답듯,
사람의 뿌리에서도 가볍게 새가 날아오른다
봄꽃처럼 화려해지려 분주한 내 연붉은 화색에
몸이 제 스스로 산과 내와 구름을 끌어온다
식욕 오른 입술이 꽃이 되어 피어난다
개나리 망울 진 울타리를 본 눈
몸의 꽃망울도 내 안에서 피어오르느라
나도 알기 전에 봄을 틔운다
아침은 대지의 길 따라 찾아 온 계절을 반기고
지금 걸어가는 내 발자국이 우주를 딛고 있음을 나는 안다
봄의 계단을 밟는 발자국마다 꽃빛 환하다
겨우내 까칠했던 뿌리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피워내듯
내 몸 밖에 서성대던 입춘을 소화하며
살모사처럼 반질한 피부로 꿈틀거리고 싶어진다
푸른 새순들이 입맛으로 돌아오는 계절,
단 하나라도 마지막 살아남을 유전자를 위해
열심히 번식의 식욕을 끌어올릴 새순이 핀다
리비아는 주소가 없다 (외 2편) / 조명희
바위주름이 해체되어 율법처럼 누운 사막 음양의 기록이 지워지는 길 위의 배후를 보라 하얗게 버석이며 추락하는 새의 날갯짓 바람 아래서는 아라비아숫자를 남발하지 않으니 모래의 표정을 읽으려면 물을 상상하지 말아라 염장된 단어들이 난분분 건조된 땅, 리비아 우기 동안 머물렀던 신기루가 둔각으로 펼쳐지는데 파동에 휘말릴수록 횡단이 쉬운 것만은 아니리라 오래 전부터 부재중인 길이 지워졌다 주장한다면 샌드스톰*에 휘말린 낙타의 유골이 소리칠 것이다 선택은 절대불이의 오아시스와도 같아 질끈 눈 감은 할라스**는 모래산으로 홀연한데 체온보다 높은 온도가 식어야만 사는 사하라 한때 쌍봉이었던 낙타의 등을 타고 다시 자라는구나 길도 없는 구릉, 불손한 히치하이크를 감행하는 사내 사구 위의 트리폴리, 어느 거리를 떠돌다 수취인불명의 사서함에 맡겨질지도 모를 일 모랫벌의 유랑이 유효한 소인으로 찍혀서야 태양의 피로 중화된 지중해안을 품을 수 있었다 유목의 무리도 귀환을 서두르는 일곱 시간의 늦은 시차 움켜쥐었던 남자의 손바닥에 힐끗, 처녀지가 움트고 손금을 따라 띄엄띄엄 그녀의 주소가 손짓을 하고 있는데 저마다 환승을 염려하는 두바이 공항 리비아발 서울행은 경유항공의 곡선이다 사내는 주소가 해체된 종로 사거리에서 다시 펼칠 일 없는 리엔트리 비자를 찢었다
* 사막에 이는 거대한 모래폭풍.
** ‘모래폭풍’의 아랍어인데 ‘마지막’이라는 어원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달달한 몸
입을 녹여버린 단맛이 몸을 먹어치우기 시작해요 쓴맛 모르고 엉겨 붙던 온몸의 피 혓바닥이 붉은 형광색으로 반짝거려요
누구도 들지 않아 기울어진 몸의 집 빗장마저 빼버린다면 폐가, 라는 병명을 붙일 수밖에 씹을 수 없는 이빨, 심심한 식도 위장 속 쓸쓸한 하소연쯤으로 생각하시길 보세요, 발가락은 붙어 있기나 한가요 끓어 넘치는 식탐이 눈알까지 삼켜버릴 듯
달그락, 달그락 뚜껑을 열어주세요 설탕에 뒹굴다 온 도너츠를 풍덩! 열 손가락이 부풀어 오르네요 어서 마디를 잘라줘야 해요 손잡이가 꺾인 부분을 따라 달려가세요
비상 탈출시 주의사항; 벽에 찰싹 엉겨 붙을 것 (내 몸에 출입을 거부한 적 없으니) 들척지근한 혀를 뽑지 말 것 그렇다면 바늘 하나 꽂아 주실래요? 몸의 감각점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롤리 롤리 팝!
샤콘느
오늘 밤 사라장의 연주 기법은 비브라토 그러니까 음과 현이 떨리는 8분 20초 사계절이 11월로 모아지는 동안 시선은 자꾸 아래턱으로 흘러내리지
속눈썹이 무거울수록 솟구치는 무릎 그럴 땐 양팔로 감싸야 해 가슴 아래 얼굴을 묻으면 허리 잘록한 단조풍의 곡들 서리 앉은 국화가 꽃잎 떨구곤 해 흰빛 물봉선은 더 이상 볼 수 없지 혹으로 부푼 꽃주머니를 치유 중이거든 랄프 신부는 한 곡의 노래에 마음을 기울이고 저기, 마지막 비행기가 출렁이는 앞바다
춤곡은 화려해야 해 도입부터 빠르고 생기 있게 은하도 작은 떨림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 가을 호숫가를 거닐면 믿게 되지 물그림자를 키우는 것은 피라미 떼 샾과 플랫의 간극이 클수록 혼란스럽지 물빛이 탁할수록 내면은 들키게 마련 가지 마, 결국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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