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박문혁

문근영 2015. 4. 19. 11:28

2008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박문혁


아버지가 다리미 하나 들고 세상 한 가운데 섰다. 비록 세상이 알 굵은 사포처럼 거칠다 해도 창가에서 응원가를 불러주는 벽돌만한 금성 라디오 벗 삼아 묵묵히 하루를 다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은 손목이 아리도록 다림질을 강요했지만, 세상을 배우는 수업료라 여겨 한번 숙인 고개를 좀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점점 달인이 되어가던 아버지.


아버지는 다리미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렸다. 장마 끝으로 축축해진 무등산 호랑이 가죽도 다리고, 학동과 지원동을 돌며 바다를 파는 목포댁의 생선 비린내도 다리고, 매번 귀가할 때마다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막노동꾼 김씨의 흘러간 노래도 다리고, 거리에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박씨의 희망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송씨의 하얀 지팡이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연탄배달을 하는 대학생의 굵은 땀방울도 스팀을 다려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방암까지 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아버지가 3평 좁은 공간에서 홀로 늙어간다. 지금껏 구겨지고 이맛살 찌푸린 것들, 매끈하게 다려 모두 손님에게 돌려주고 마지막 남은 것이라곤 고작 몸에 걸친 한 벌 외로움 뿐.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아버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리지 못한다. 늦은 밤 나는 아버지가 벗어놓은 외로움을 빳빳하게 다려서 어머니 영정 옆에 쓸쩍 걸어놓는다.


미사일처럼 세워놓은 다리미가 어둠을 다림질하며 하늘로 솟아오를 듯.

 

 

 

[심사평]


이은봉(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좋은 시는 참신한 발상과 세련된 말맛의 활용에서 온다. 참신한 발상은 전복적 상상력, 역발상, 반상합도 등의 언표로 요약되는 새로운 상상력을 뜻하고, 세련된 말맛의 활용은 활기 있고, 윤기 있고, 기품 있는 언어의 활용을 뜻한다. 물론 이런 뜻을 갖는 시를 쓰기는 쉽지 않다. 그것 자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전체의 진전된 심미적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1천500편이 넘는 시를 읽은 기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일차 예심에 통과된 작품은 모두 10편이었다. 박문혁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박월출의 '눈은 내리고 나는 걷고 걸어', 천순덕의 '가슴앓이', 김석윤의 '고비를 횡단하다', 박석준의 '은행 앞, 은행잎 뒹구는 여름날', 홍경화의 '허브향을 맡으면 속이 쓰리다', 박명남의 '떠나야 할 때', 김화정의 '코스모스와 여자', 장화숙의 '구절초 제국', 최영희의 '알흔섬'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작품 중 최영희, 장화숙, 김화정, 박명남의 시는 정서의 범주가 크고 굵지 못하다는 점에서 맨 먼저 제외됐다. 이어 박석준의 시와 홍경화의 시도 감각이 새롭고 언어가 활달하다는 점에서는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 이상이 없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곧바로 김석윤의 시도 제외시켰는데, 이 시 지니고 있는 건강한 노동의식을 나머지 시들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천순덕, 박월출, 박문혁의 시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는데, 최종 당선작으로 선택된 작품은 박문혁의 시였다.


천순덕의 시가 제외된 까닭은 작품의 스케일이 작지도 했지만 발상이나 언어의 운용 면에서 좀더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박월출의 시는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며 자신의 의식과 언어를 닦아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사를 맡은 사람을 주저하게 했다. 맨 끝까지 남은 박문혁의 시도 모든 면에서 다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선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장중한 정서를 바탕으로 건강한 노동의식 및 아버지로 대표되는 시간적 동일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루 주목이 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낙선자에게는 내일의 영광을 빈다.

 

 


[당선소감]

 

언젠가 모 잡지에서 '에디슨'이 8톤트럭으로 10대 분량이나 되는 공책을 유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그가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수많은 발명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저는 문학계의 '에디슨'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홀로 고독한 언어의 칼을 벼려왔습니다. 그리하여 2년 전에는 불교신문과 경향신문에 단편소설이 최종심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북망산 초입에서 유언장을 쓰는 각오로 시와 소설을 쓸 것입니다.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금세 톱밥난로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를 논할 때마다 늘 용가리가 되어 불을 뿜는 한상원 선생님과 장승에 혼을 불어넣는 김진문 시인, 내가 힘들 때마다 격려를 적립해 주시는 국립나주병원 위성광 씨, 그리고 청포도문학 동인 여러분에게 신의 가피가 함께 하기를….


아울러 아직 혀가 덜 풀린 저의 음어에 따뜻한 오리털 눈길을 보내주신 생면부지의 심사위원님과 이 행사와 관련해 수고하신 분들, 문화부 기자님, 무등일보사에 잠수정처럼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박문혁 시인
1961년 담양 출생, 본명 박재근
산림청·산림조합중앙회 주최
산림문화작품 공모 일반부 시 부문 대상
청포도문학 동인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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