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 조혜정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심사평]
"작품 장점 찾으려 후속작까지 정독"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했다. 거듭 읽어도 두드러진 작품이 보이지 않아 두 심사위원은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채 숙고를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메타세콰이어' '유클리드 연대기' '구름 위의 문장들' '두부의 힘' '주왕산' '천 개의 붉은 방'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한 시인의 개성화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군데군데의 흠을 지니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의 장점을 발견하는데 주력하며 후속 작품들까지 정독했다.
'메타세콰이어'는 발상이 신선하고 마지막 연이 진한 여운을 던진다는 미덕이 있으나 전체의 시가 지니는 언어들의 긴장감이 떨어지며 후속 작품들의 수준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한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유클리드 연대기'는 일종, 이야기 시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의 흐름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시는 편안하게 읽히기는 하나 언어의 긴장미가 떨어진다는 결함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시 안에 탈자(脫字)가 있음도 주의를 요한다. '구름 위의 문장들'은 '붉은 호수'와 함께 최근 유행하는 시들을 많이 읽었거나 그런 습작의 훈련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가 일상성에서 일탈한 신선한 감수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주왕산'은
섬세한 감각의 미덕을 보이고 있다. 흔하지 않은 새 이름, 꽃 이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도 돋보인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가 갖는 공통적인 흠인 전달력과 무게의 약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부의 힘'은 부드럽고 유려한 언어의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음미할수록 시의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고 부분 부분 좋은 구절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부가 서술적이고 긴장미가 떨어져 독자를 견인할 힘이 약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천개의 붉은 방'과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였다. '천 개의 붉은 방'은 강렬한 이미지와 생동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음이 장점이다. 형태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오랫동안 심사위원들을 숙고케 한 작품이다. 하지만 허두 부분의 신선함에 비해 중간 부분이 흐려져 있다. 거기 비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는 허두부터 언어의 세련미가 돋보이고 참신한 상상력의 자장을 띠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한 정련의 과정을 말한 시인데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솟아난다. 그러나 후반부가 흐리고 기성 시인의 냄새를 풍기며 행을 좀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은 이상의 작품들이 갖는 결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작품으로 보이는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응모자 여러분의 문운을 빈다.
◇ 심사위원 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시인·고려대 교수)
[당선소감]
사라진 세상의 소리를 만난듯…
안팎으로 열리는 문만을 열어본 사람은 구름의 손잡이를 찾을 수 없다. 손잡이 없는 구름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시(詩)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가 말해준 빛나는 것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도마소리가 집집의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저녁이었다.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이면 이미 끝장난 세상의 다음날, 고요까지 다 사라졌는데 홀로 남아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귀 같았다. 詩는 사라진 세상의 소리들을 하나씩 되살려 기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바람들이, 돌멩이들이 한순간의 기억만으로영원을 견딘다고 믿는다. 구름의 손잡이를 잠시 잡았다 놓친 것 같은 이 느낌만으로 시를 놓지 않고 길의 끝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 시와 반시 문예대학 강현국·구석본 선생님, 가르침을 주신 모든 선생님들과 시를 쓰며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영남일보에 감사드린다. 부모님과 내 가족,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작가 약력
△1963년 충남 당진
△목원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7년 11월 시와반시 하반기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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