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년 전북중앙 신춘문예 당선시 (가작) / 김지고, 노기민

문근영 2015. 4. 18. 19:20

2008 전북중앙 신춘문예 당선시 (가작)

 

 

명함 (김지고)
경건한 설거지 (노기민)

 

 

 

명함 / 김지고

 

 

당신이 떨구고 간 가을이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건물과 그림자 사이를 내통하는 햇살 아래
찢어질 듯, 겨드랑이 날개로만 살아가는
회색의 떨켜에서 떨어진 가랑잎, 나비
서리 맞은 꽃술에 시든 빨대를 꽂는다

고치의 하루 일없어 우화등선 봐둔 걸까 온통 전면이 당신의 노오란 풍경으로 떠 있다 꾹꾹 눌러 박은 근엄한 문자의 씨알들, 막 튜닝을 끝낸 줄에서 튕겨 나온 듯 말짱한 얼굴로 앉아 있다 세상은 널다란 꽃밭이다 팔랑팔랑 시궁창 내를 건너 궁창에 올라 춤을 춘다 꽃이 흔들리고 꽃밭이 흔들린다 쓰디쓴 꿀맛의 밥상에는 일용할 비구름 시럽과 눅눅한 햇살 조금이다 높은음자리 찾아 골목골목을 누비다 그만, 어둑살에 주저앉는다 당신의 차가운 손끝에서 한번쯤 다시 새겨 넣어도 좋았을 고도의 추락 문득, 하늘마저 가볍다 바람을 태워 활처럼 휘어져가는 날개죽지 뒷면은 가랑잎이다 무반주의 어머니 신음소리가 찍혀 있는 잎맥이다 생의 가장자리에는 어릿어릿 졸음만 남아

 

당신의 가랑이 사잇길 같은 봄날
그만 놓쳐 버린 나비의 슬픈 눈을 보았는가
아직도 층층이 가랑잎을 매단 나무 아래
더 이상 존재를 알릴 필요 없이
수직으로 착지한 날개에 고요의 무늬가 찍혀 있다

 

 

 

경건한 설거지 / 노기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안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방 안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나의 찌꺼기를
바라 볼 수 있었다.


굳게 두 손을 맞잡고, 결을 따라
일(日)을 문지르고, 시(時)를 문지르고
분(分)을 문지른다
거품이 나고 후회가 들고
씻겨나가고 결심을 해도
그래도, 닦이지 않는 얼룩.

아, 나에게도 세척기가 있다면!
일정한 습도와 온도에서
나는 젖어졌다가도 금세 물기 없이
말라지고, 오랜 시간 물에 담겨져
불려 지지는 않을 테니.

아니다
제 스스로도 닦을 수 없다면
그것이 온전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 / 시조 신춘심사평]

 

운문분야에 응모한 작품은 200여 편이다. 작년의 편수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숫자이다. 투고자들의 호응도가 낮은 반면에 응모작의 예술적 성숙도는 작년에 비해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식의 구분 없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네 사람의 투고 작품을 본선 심사대상으로 삼았다. 고선례의 ‘낙타 등’ 외 2편, 김지고의 ‘명함’ 외 2편, 노기민의 ‘경건한 설거지’ 외 4편, 임해야(필명)의 ‘앵무새의 꿈’ 외 4편이 그것이다.


각자 투고한 3~5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숙고를 거듭한 결과 결선대상을 두 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별 투고 작품의 전체 수준, 둘째 이미지의 활용과 상상력의 전개 등 예술적 형상화 능력, 셋째 신인으로서의 도전정신과 참신성 등이다. 노기민과 김지고의 작품들이 임해야와 고선례의 그것들보다 상대적인 우위성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명함’ 외 2편은 소재를 다루는 솜씨나 그것에 대한 시적 발상에서 독특한 감각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건한 설거지’ 외 4편은 메시지의 전달에서 호소력 있게 다가온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기민은 ‘설거지’라는 소재를 통하여 ‘수신(修身)’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중요한 문제에 접근해 간다. 그것은 세척기에 그릇을 씻는 것처럼 “닦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마음’과 관련된 일이다.


사소한 생활 속의 소재에서 의미심장한 삶의 어떤 측면을 관찰하여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그러나 “생(生)을 낳기에 아직 많이 어린”(‘탄생’) 노기민의 작시법은 기성 문인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신인으로서의 자기스타일과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김지고의 작품은 사변적(思辨的)이거나 관념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시적 의미를 포착하기가 어렵다.


“검버섯꽃 환하게 펼쳐든 불안(佛顔)”([불안의 거처])이나 초강력 점착제인 ‘쥐포수’를 소재를 삼은 작품들이 그렇다. ‘쥐포수’나 ‘불안의 거처’에 의미가 부재(不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심주제가 모호하거나 분산되는 것은 메시지의 전달이나 독자의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장애 요인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지고는 노기민과 대조되는 개성과 창작스타일을 보여준다. 노기민은 ‘비밀’이나 ‘땀’의 경우처럼 패기가 부족하고 기성문단의 조류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다.


김지고는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도전정신이 충일하다. 그의 작품 또한 참신한 느낌을 준다. “생의 가장자리”에 어릿거리는 “노오란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 ‘명함’이 그러한 예이다. 시예술의 과녁을 겨냥하여 언어를 날렸던 무수한 인고의 세월이 ‘명함’처럼 건네진 ‘가을낙엽의 이미지’에 각인되어 있다.


‘명함’과 ‘경건한 설거지’ 중 어느 한 작품을 탈락시키기가 난감하다. 각각의 작품이 지닌 미덕과 단점이 뚜렷이 대비된다.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두 작품을 결정했다. 노기민과 김지고 당선자들에게 정진의 자세를 당부하면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전정구 전북대 교수>

 

 

 

[시 가작 당선소감 / 김지고]

 

달빛으로 달려 집으로 가는 밤은 아름다웠습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새도 짐승도 모두 쫓아 보냈습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 숨소리조차 날려 보내곤 했습니다. 땡볕 아래 옥수수 대궁 하나 없는 텅 빈 밭이었습니다. 호미를 든 쓸쓸함이 들어와 나도 모르게 엉겨붙었습니다. 어설픈 호미질에 땅땅 맨땅이 울고, 삽질에 돌멩이 튕겨나와 부메랑처럼 몸을 때렸습니다. 흙먼지 뽀얗게 내 몸을 감싸 안은 저 편, 개망초꽃이 노랗게 흔들렸습니다.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들여다봅니다. 가슴과 머리에 달라붙은 검은 그림자를 새삼 확인해봅니다. 이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허리굽은 농부가 그랬듯 접혀진 마음 귀퉁이 자락을 폅니다. 딱히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지만, 밭둑에 보이는 쑤욱 불거진 몇 개의 돌덩이가 밭 전체를 녹이려 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건성건성 믿는 종교처럼 오랫동안 시를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몇 줌 밖에 안되는 시심으로 호미와 삽날만 반짝거리며 흙을 덮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씨 뿌리고 오갈 든 싹을 틔었습니다. 이제, 잃어버린 신발을 찾듯, 내쫓은 새와 짐승의 발자국조차 불러 들여 넉넉한 지심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중앙신문’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달려가도록 질책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강희안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애정 어린 충고와 사랑으로 감싸준 한걸음 동인과 배재대 시창작반 문우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숲속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참 오랫동안 기다려준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김지고
·1960년 익산생
·인하대 사회과 졸업
·주부

 

 

 

[시 가작 당선 소감 / 노기민]

 

먼저 제게 과분한 선물을 준비해주신 주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이 너무도 쓰고 싶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는데 고집을 부려 올해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습니다. 부모님의 허리를 더 휘게 하면서까지 제가 걸어가야 할 ‘행복한 길’ 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과 뜻대로 시는 써지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잦아지기만 합니다. 이제는 거짓이 아닌 더 나은 진실된 글을 쓰고 싶습니다.


12월이 되자 수험생이라는 부담이 저를 짓눌렀던 솔직한 심정도 남깁니다. 창작과 진학 그리고 온 집안의 갈등 속에서 제가 뻔뻔해지지 않으면 고개 들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며 선생님께서 신춘문예를 권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어떻게, 하던 마음이 설마, 설마 하면서 투고한 신춘문예, 사실은 당선 소식을 통보 받게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저는 제 의지보다 써지지 않는 시를 또 부여잡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작으로 입선이 되다니….


와우,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어느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가져다 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많이 모자라고 부족한 제게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 말 없이 아들과 손자를 믿고 계시는 부모님과 조부님께 큰 감사드립니다.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안명옥 선생님, 배용제 선생님, 김기혁 선생님, 전학을 다짐받고자 했을 때 반드시 그 꿈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던 정현호 선생님, 어느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 해주시는 조다윗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까마득히 멀기만 한 글쓰기, 발바닥이 시라 여기며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양예술고 문예창작과 동기, 후배들에게도 추운 날 군고구마 하나씩 까서 내밀 듯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함께 의지하고 있는 혈열(血熱) 문우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쁘기도 합니다. 부끄러움보다 더욱 두렵기도 합니다. 이를 견뎌내듯 시와 함께 저도 그 사랑을 글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감사함을 무게로 달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노기민
·1990년 서울생
·고양 예술고 2년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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