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자의 풍선 / 오지영
내 몸에 알록달록 풍선이 살고 있어요
풍선 속을 가득 채운 심장 모양의 푸른 바람을
나는 ‘그’라고 부르며
가끔 등에 태우고 둥둥 떠다니기도 하지요
둘의 호흡이 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올랐던
절정의 꼭대기에서
싱싱한 나무가 급사하는 것을 목격한 후
내 고운 풍선들도 그 비슷한 소멸, 아니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팽창의 한계점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펑
새벽이 어둠을 밀쳐내고 또다시
거대한 풍선을 안아 올릴 때까지
웅크린 내 몸 구석구석에서 새는 바람 소리
편두통처럼 아리게 들려왔어요
즐거운 나의 집
왁자지껄한 일상에 매달려 아찔하게 흔들릴 때도
아이들은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러댔고
개 발자국에 밟혀 사라진 보랏빛 환상이며
애당초 불량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회색빛 가슴까지
몸 가득 알슬기했던 팽팽한 풍선은
손 뻗어 꺼내기도 전에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텅 빈 무게
알알한 합성고무냄새가 집안 가득 차기 시작했어요
물렁물렁하게 잡히는 비닐거죽, 바람도 느낄 수 없어
단단하고 선명한 시간이 사그라지고 있어요
알록달록 풍선을 몇 봉지 더 사왔지요
내 배란주기보다 짧게 살다가는 생을 위하여
몸 가득 오색바람 채우고 날아오르기 위하여
[당선소감]
눈부시게 떠오른 해를 감당할 수 없어 등산복을 차려입고 문을 나선다. 아파트를 둘러치고 있는 천마산 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땅위에수북히 쌓인 죽음의 조각들이 땅속에 숨은 생명의 겉자락과 만날 때마다 숨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앞질러가는 거친 숨소리, 아마 두어 시간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얼마 전 김남조 선생님께서 열여섯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 출판기념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시인은 처음부터 지혜로우면서 열정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되려고 노력하고 되려고 하는 방향을 인식한다.”
평생 시를 위해 살아오신 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원로시인이지만 아직껏 시를 위해 노력하고, 살아계신 동안 끊임없이 노력하려는 시인의 삶이 시금석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다. 산을 오르면서 겪게 되는 숨가뿜과 고난이 있는가하면 숲에 살아가는 나무들과 생명, 내딛는 발걸음에서 느끼는 존재감 등의 귀한 것들도 가득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방향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은 반드시 정상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시에 대한 열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저 멀리 내가 서야할 봉우리가 보인다. 너무 기쁘다. 어린 아이처럼 마구 소리치며 날아가고 싶다.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늘 채근하고 이끌어주신 문학회 동인들, 스승님과 선배님들, 지친 일상 가운데 여유로운 웃음을 건네주던 직장 동료들,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부족한 시에 꿈을 불어넣어주신 경남일보, 심사위원님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진솔한 나의 독자가 되어주던 남편과 가족들, 아들, 딸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여자의 욕망과 소멸에 대한 시'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대개 의미없는 심각함, 과잉의 포즈, 근거없는 무의식 등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금년에는 그런 현상들이 후경으로 물러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시부문 응모작들 가운데서 두 선자는 이종섭씨의 ‘꽃의 무게’ 김시온씨의 ‘회귀’오자영씨의 ‘여자의 풍선’을 최종심에 올렸다. ‘꽃의 무게’는 꽃의 낙화에 관한 시로서 감각이 있어 보였다. 가지와 꽃, 바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시인데 언어의 절제가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바람을 휘갈겨 쓴/가지들의 초서체" "누워 있는 꽃들에게 읽어 주는 꽃을 위한 조사" 등의 구절에서 낱말 선택의 재치와 감각이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시에서의 어떤 무게랄까, 완결도랄까 하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김시온씨의 ‘회귀’는 '그'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인데 언어와 이미지와 '잡히지 않는 어떤 것'과의 연결에서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끈이 조여있지 않거나 조였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읽혔다. 시에서의 주조음을 이미지나 의미의 전개에 풀어넣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자영씨의 ‘여자의 풍선’은 여자의 욕망과 그 소멸에 대한 작품으로 눈에 띄었다. 결국 인간의 존재 문제인데 그것은 슬프게도 사멸을 전제로 한 존재이다. 욕망(바람)은 번번히 짧은 절정에서 끝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므로 쉬지 않고 불어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허무이면서도 허무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 부조리를 드러내 보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두 선자는 세 편 중에서 ‘여자의 풍선’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시간을 길게 쓰지 않았다. ‘꽃의 무게’‘회귀’를 쓴 두 분은 더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강희근(시인 경상대 교수) 이상옥(시인 창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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