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예의 /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심사평]
상투형 벗어난 신선한 가능성
뽑는이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김중곤의 '소금밭의 기억', 조연미의 '예의' 두 편이다. '소금밭의 기억'은 녹록지 않은 시력으로 다져진 단단한 틀거지를 지녔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다소 낯익은 글감에 대한 흔치 않은 상상적 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 세부까지 충분한 제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열아홉 줄에 걸친 한 편 시 속에서 '하얀'이라는 수식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응모자는 곰곰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조연미의 '예의'는 '소금밭의 기억'에 견주어 단연 신선하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지닌 역량도 만만찮다. 사소한 일상을 결코 범상하지 않게 다듬어 내는 솜씨가 고르다. '예의'는 나와 타자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따뜻하면서도 곡진하게 끌어 안은 작품이다. '창'과 '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경계를 축으로 그 너머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상상적 줄거리는 가벼운 반어적 기슭까지 닿아 있다. 아직도 시가 우리 둘레에서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가 됨직한 작품이다. 게다가 '몸의 뜨거움으로/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와 같은 빛나는 깨달음까지 얻고 있음에랴. 뽑는이들은 상투형을 벗어난 '예의'의 신선한 가능성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어 당선작으로 민다. 모름지기 오래 기억될 시인으로 거듭나기 바란다.
뽑는이들의 눈을 한참 머물게 했던 작품을 보내준 세 사람, 예컨대 '아버지의 침대'의 박금숙, '벽'의 박해술, 그리고 '102번을 타고'의 조해점과 같은 이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머지않아 제 목소리를 내는 신인으로 즐겁게 만날 수 있으리라. / 입력시간: 2008. 01.01. 10:12
[당선소감]
꿈꾸고 원한다면 결국 다다를 것
당신의 이름은 은주…, 최은주(崔恩主).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니의 가난한 끼니를 챙기며 자신의 젖을 짜 내밀던 스물 셋의 어미, 쌀가마니 쌓인 곳간을 보고 배 굶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시집간 스물의 처녀, 쌀 사오라는 심부름으로 책가방을 사 쫓겨난 맹랑하던 고아 계집아이. 당신과 나의 심장이 하나로 포개져, 그 심장의 두근거림이 멀리까지 징검다리를 놓던 시절, 당신이 도곤도곤 울려 주던 심장의 장단에 맞춰 세상으로 나아갈 걸음을 놓던 조그마하던 아이가 당신을 불러도 될까요.
시인들의 시를 따라 적던 굳은살 하나면 족하다, 했던 나날들. 늘 열정을 열망하면서도 먹기 위해서 잠자릴 위해서 다른 곳에 있어야 해도, 늘 그것만 생각하고, 꿈꾸고, 원한다면, 한 줄의 글은 당신의 심장소리를 따라 놓이던 징검다리처럼 나를 다다르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으로 족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발화로 나는 다른 얼굴을 가진 무수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운 나의… 은주 씨.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리며, 강형철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또한 강연호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조연미 시인
1981년 서울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휴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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