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은규

문근영 2015. 4. 18. 19:17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을 잊는다, 한 점 바람

 

 

머리맡에 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

최초의 시는 시의 몸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가 아닌 것에서 시의 속살을 만나다니, 새삼 (역)은 (진)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살의 아이는 어느 날 고분의 등잔 사진을 보게 된다. 복숭아 모양의 등잔을 보는 순간 몸 안의 혈액들이 출렁, 그 후 어두운 무덤 내부가 등잔 빛에 환히 열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혹시, 저것은 시가 아닐까 자문하는 날이 길었다. 시를 알기 전 시적인 것에 생의 운율이 출렁이다니.

영혼의 심지에 불을 놓았을 어느 손길. 불빛으로 한 생의 삶의 폭을 넓히겠다는 기원과, 한기에 영영 얼지 말라며 다독였을 시정()이 거기 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겠지. 그 주문은 언어이면서 언어의 배후. 침묵은 언어의 배후로 알맞지, 꽃의 배후가 허공인 것처럼.

늘 존재 자체로 시이신 고재종 선생님과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객지에서의 새움을 틔우는 데 도움을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족들과 바람으로라도 가닿고 싶은 정처()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의 나와 도약의 지점에 대한 약속을 맺는다. 머리맡에 시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이다. 그 밤들을 생이 함께 지새워 줄 것.

이은규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 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요즘 답지 않은 탁트임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 등 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등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이시영 시인

남진우 시인·문학평론가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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