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7년 한국일보 시 당선작

문근영 2015. 4. 17. 08:18

[인터뷰] "사람 발보다 낮은 詩 쓰고싶어"

이용임(30)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 석사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5년차 직장인으로, 남 보기에 더없이 버젓하다. 그러나 본인은 그 삶이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었다고 말한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많이 앓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내가 평생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이건 아닌데 싶었죠. 그때 뭔가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시였어요. 아, 시구나! 시면 되겠구나 생각했죠."

문학은 그에게 좌절된 욕망이었다. 어릴 때부터 꿈을 물으면 작가라고 대답했던 그이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문학을 전공하지 못했다. "엄마, 이모, 할아버지 모두 '문청'이셨어요. 그래서 더더욱 반대하셨죠. 그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다치는 일인지 당신들이 더 잘 아셨으니까요."

억눌린 것은 귀환하기 마련이다. 시는 그를 찾아왔고, 그는 시를 만나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학교를 다녔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시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2년간 쓴 시가 300여편.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쁘기보단 무서웠어요. 좋은 시, 열심히, 많이 써야 하는데 내 밑바닥이 너무 얕아 두려움이 앞서요." 문학이론도, 철학도 부족하다는 조바심이 들 때가 많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문학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보다 내 시야가 더 많이 열려있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엘리펀트맨>은 일산 집에서 서초동 회사까지 가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썼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문득 올려놓은 팔이 코끼리 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들고 있던 문예지 제일 뒷장에 바로 쓰기 시작했죠." 초고에서 조사 몇 개만 고치고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시다. "저뿐 아니라 지하철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상의 피로에 찌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서서 조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은데, 사회가 왜곡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몸의 기형으로 그려진 듯해요."

그는 앞으로 '낮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시 쓰는 사람은 항상 가슴이 아파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을 대신해 앓아야 하니까요. 저는 연민이 없는 시는 싫습니다. 가장 낮은 시, 사람 발보다 더 낮은 데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형체 없는 것, 다 부서진 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요."







▲ 엘리펀트맨 /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당선소감]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

털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십니다.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아이쿠 추워라, 중얼중얼 노래하듯 유모차를 미십니다. 담요에 싸여 눈만 까맣게 내놓은 아기가 그 소리에 벙긋벙긋 웃습니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내밉니다. 그 조그만 손가락 끝에 바람이 감기는 듯합니다.

당선 통보를 받던 날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잠깐 지상구간을 달리는 지하철 창문으로 안개 너머 어렴풋하게 지붕들이 보였습니다. 저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이 안개를 뚫고 한참을 가야 하겠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일어나다가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은 한참을 헤매어야 하겠구나 하며 지친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는데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이랄까요. 어리둥절해 앉아있다가 문득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단순한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뒤섞인 설렘이었습니다.

시의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아직 한참을 더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 길에서 거대하고 친절한 손가락이 튀어나와 이쪽, 이쪽 하면서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그럼 이제 이 한 발짝이 다시 첫 발걸음이지요.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시의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매서운 바람에 손가락 발가락 끝이 다 얼어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이란 유모차를 밀고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하고 노래 부르는 일이라 믿습니다. 마음을 바닥에 대고 마음으로 바닥을 밀면서 온몸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낮게 낮추었을 때, 그 밑바닥에는 연민이 있습니다. 핍진하고 고독하게 연민하는 자, 그 열렬한 사랑이 감히 시인일 것이라 말해봅니다.

이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모자란 시를 다독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 없이 몸으로 보여주신 차창룡 선생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속되지 않고 진실한 시의 길을 일러주신 이경림 선생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애정으로 다독여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모든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나라에 있는 고독한 창틀에 기대어 오늘도 시를 꿈꾸는 뿌리 동인들께 이 기쁨을 돌립니다. 길모퉁이에서 만난 많은 도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유미, 정화, 희경, 혜정, 너희들이 있어서 나는 언제나 행복하단다. 정직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동생 욱이가 있어서 저는 오늘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과 몸, 그 너머의 무엇까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저 위대하고 사랑스런 자궁에게 눈물을 바칩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 이용임(李庸任)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 ㈜핸디소프트 선임연구위원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외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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