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정은기

문근영 2015. 4. 18. 19:19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인터뷰]


"가만히 방향의 이정표되는 작품 쓰고 싶어"

 

정은기(28)씨의 시작(詩作)은 문학보단 여성에 대한 선망으로 시작됐다.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한 정씨는 여학생과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문예반에 가입했다.


착각이었다. 남자반은 여자 선배, 여자반은 남자 선배의 지도로 엄격한 합평회가 열렸다. 살가운 이성교제는 물 건너갔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새록새록했다. “글 잘 쓴다는 칭찬에 매료됐다. ‘공부 잘한다’ 같은 칭찬과는 달랐다. 칭찬 받고 싶어 시를 썼다. 나아가 내가 쓴 작품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정씨에게 세계의 중심은 시(詩)가 됐다. 무슨 일을 선택하든 글을 쓰는 일과 연관지었다. 대학 전공은 어문학과를 택했고, 문학회, 독서토론회, 학보사 등 글쓰기와 관련된 동아리를 찾아 몸담았다. 처음 들어간 학교와 편입한 학교 모두에서 학보사 공모 문학상에 당선됐다.


대학원에 진학해선 ‘문예창작단’이란 이름의 정예 스터디 그룹에서 창작 공부에 매진해왔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다보니 정씨의 일상은 문학으로 고취되고 독려받는 일의 연속이다. “시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의 정점”이라고 평한 그는 “시 쓰는 사람들이 종종 드러내는 오만하리만치 대단한 우월감은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최근 2, 3년간 가장 돋보이는 ‘예비 작가’였다.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도 여러 차례. 그는 “등단 안해도 열심히 쓰면 된다고 하다가도 12월만 되면 (신춘문예 당선에) 집착하게 되는 마음을 다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그간의 심적 부담을 토로했다. 아울러 문청이라면 누구나 희망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나만의 습작법’으로 정씨는 ‘연작시 쓰기’를 소개했다. 한 사물에 대해 구체적 묘사에서 추상적 의미화로 단계를 옮겨가며 연작시를 쓰는 것이다. 정씨는 상투적 의미가 많이 부여돼 있지 않은 소재를 찾아 100여 개의 시를 써보는 훈련이 필력을 키우는데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휴대폰 녹음이나 문자 기능을 이용해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둔다는 정씨는 “이쪽으로 가라고 외치기보단 가만히 서서 방향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당선소감]

 

"내속에 들끓었던 고민과 갈등에 위안"


오래전부터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저자의 약력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책의 가장 처음에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력 한두 개쯤 발견하고 나면 어떤 특별함도 없는 나의 이력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시의 문장은 어떤 비기와도 같은 천재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었었고 조용히 우리 가족의 기원을 의심해보기도 했었다. 나는 왜 천재가 아닌가하는 치기어린 열등감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가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늘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서툴렀다. 때문에 너무 쉽게 타인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긍정하려했고 뒷전에 물러나서는 슬플 것 없는 내 삶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매우 어리석었다.


계속되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동안 나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는 특별한 이력이나 천재성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평범한 내 삶과 무거운 엉덩이와 큰 머리, 굵은 손가락,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무대뽀식의 내 젊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한자리에 끝까지 앉아서 오랫동안 응시하고 무겁고 육중한 시를 쓰는 일이 내 체질에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던 지난 밤, 아직은 설익은 작품으로 당선된 것에 대해 내 속에서 들끓었던 많은 고민과 갈등에 작은 위안을 삼고자 한다. 무엇보다 부족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꾸준하게 오래도록 쓰겠다는 다짐으로 감사드린다. 참된 삶으로 이끄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주신 김재홍 교수님과 게으름과 나태에 끊임없이 죽비를 내려주시던 박주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늘 애정을 가지고 시를 보아준 思詩美의 호남형, 학중형 그들보다 먼저 이름을 걸게 되어 미안하다. 경희문예창작단에서 함께 시를 쓰고 있는 재범형, 경섭이, 은지, 규진이 그리고 많은 선후배들, 사랑한다. 아직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서툴지만 그들에게 하나둘 배우고 있어 매우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당선 소식에 눈물로 축하해주신 우리 김복순 여사님과 아버지 정채용씨, 동생 다금이, 사랑합니다. ]

 

 

정은기(鄭恩技) 시인

1979년 충북 괴산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심사평]


"언어적 감수성·말걸기의 새로움 번뜩"


시는 말 걸기다. 시적 대상에게 말 걸기.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직 시가 아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결국 독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시는 대화다. 그러니 시적 대상과의 대화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독자와의 대화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한 작품, 즉 새로운 시인을 가려내는 과정은 곧 개성적인 대화 능력을 선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여섯 편의 응모작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홍종화의 <투명한 돌밭>, 신희진의 <온난화>, 임재정의 <나를 겨누다>, 임경섭의 <자동판매 김대리>, 박은지의 <뿔의 냄새>,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이 가운데 먼저 네 편을 제외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투명한 돌밭>은 비유와 묘사가 탁월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온난화>는 구성과 전개가 자연스러웠으나 결말이 어색했다. <나를 겨누다>는 단단한 기본기가 눈길을 끌었지만 애인과의 이별과 사과를 깎는 행위가 작위적으로 보였다. <자동판매 김대리> 역시 시적 주체의 행위가 개연성을 갖지 못했다.


남은 두 작품은 박은지의 <뿔의 냄새>와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박은지의 작품이 성숙했지만, 표현의 차원에서는 정은기의 작품이 뛰어났다. 결말 처리는 박은지가 우수했고, 도입부는 정은기가 참신했다. 두 응모작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정은기의 언어적 감수성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이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동시에 최종심에 오른 다섯 분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부디 출발 시점에 연연해하지 말고, 길게 보시기 바란다. 10년, 20년 뒤 누가 더 좋은 시를 쓸 것인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시 부문 심사 : 이문재, 정호승, 이숭원.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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