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지현

문근영 2015. 4. 18. 19:20

200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리떼의 겨울 /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심사평-시]

 

시문학의 양산, 빈곤한 시대의 역설


시대는 참으로 수상하다. 사람됨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물질의 위력과 현실 의제에 밀려나는 형국이니 어찌 수상타 하지 않으리오. 사람됨의 최소한의 덕목들이 정신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정신·문화적 가치가 황폐한 시대일수록 이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정신력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욕구는 더 뜨거워지는 것인가?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품 수가 모두 1351편에 이르렀다. 양적인 수확에서 기록적이며, 각 작품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정신의 치열성에서도 기대에 값하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여분의 응모자들이 투고한 30여 편이었다. 이희정의 ‘기억의 성지’는 시적 완결성에서는 일정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하다는 데서, 원창훈의 ‘FTA’는 현실을 조응해 내고 이를 시적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시력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시적 긴장도가 처진다는 데서, 이혜숙의 ‘빌딩’은 소재가 주는 비인간성의 측면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으나 시정신의 참신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데서 심사자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지현의 ‘오리떼의 겨울’은 일단 정통적인 시수업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는 데서 안정감을 주었다.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구축해 내는 이미지들이 여타 응모작들에 비해서 참신하였으며, 소재를 응시하는 서정으로 시의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솜씨를 인정하면서 최종 당선작으로 삼았다.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나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등의 아름다운 의미나 참신한 표현은 시 수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시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사족 하나. 응모자들이 서너 편의 응모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올린 시보다 그 다음 장의 시들에 호감이 가는 시가 많았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홈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도 그럴 것이다.

정양(시인, 우석대 명예교수), 이동희(시인)

 

 

[당선소감-시]


"열심히 새로운 짐을 꾸려야죠"


막상 짐을 꾸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옮길 것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면서 하루 해를 다 보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보자기는 펼쳤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했죠. 당선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앞서 그 짐꾸리던 일들이 퍼뜩 떠오릅니다.


이제 또 짐을 꾸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새로운 짐을 꾸리는 일은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겠죠. 묵은 먼지도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혀보고 구석에 숨어 있는 동전들도 하나씩 챙기면서 열심히 저만의 짐을 꾸리겠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 이용범 선생님,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이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출처 : 대구문학 – 시야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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