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3년[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작

문근영 2015. 4. 16. 11:52
2003년[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고단에서

 
박지선

 
들국화 흐드러진 골짜기를 오르다가

무너져 벽만 남은 수용소를 보았다

이끼마저 비켜선 벽 군데군데

손톱으로 긁어 쓴 글자들

그대와 내가 어느 쪽 사람이었든 한 데 섞여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을까

18세 소년이 남기고자 했던 것은 이름 석 자 였을까?

이루지 못한 꿈꾸던 나라였을까

한 때는 푸르름으로 싱그럽던 산은

잎 하나 지키지 못해 알몸으로 울음 운다

쫓고 쫓기는 발자국으로 무수히

넘나들던 노고단에서

억새풀로 흩어지는 옛 토굴의 전사여

멈추어 서기엔 얼어터진 발가락이 떨어지고

오르기엔 발목까지 차오르는 피고름

별빛마저 숨어버린 적막인데

발길 붙잡던 눈보라 헤치고 마침내

노고단 정상에 서니 하늘 가득 덮어오는

눈바람 소리

 

명치끝이 아리도록 그리운 이여

삭정이가 되어버린 언 손으로 돌탑을 쌓는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깃발을 묻고 재배를 올린다

저 멀리 산 아래 엎드려 있는 11월의 산은

형형색색 곱기만 한데

화엄사 범종소리 산허리를 휘어 감고

천황봉을 울린다

둥 둥 둥



시 심사평 - 송수권(시인)
 예심을 거쳐 본심에 넘어온 작품은 30여편(명)이었다.
그중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농촌의 피폐화를 다룬 '우리동네 카스바'(하주자), '악어 핸드백'(차주일), '노고단에서'(박지선) 등 세 편이었다. 세 편 다 형상화의 능력이 없어 보였고, 그만큼 감동의 폭도 줄어들어 섭섭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중 상상력을 잘 타고 있는 '악어 핸드백'은 디테일은 선명하나 설명으로 그친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고, '우리동네 카스바' 또한 현실문제를 다루어 살아 움직이는 시로서는 점수를 높이 줄만했으나 진부한 언어가 식상이었다. '노고단에서'는 지리산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현실과 결부시켰으나 그대와 나, 그리운이여, 깃발, 꿈꾸던 나라 등 유통언어(상투성)에 짓눌려 목소리가 방만해진 점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인식소에 따른 시인의 정체성을 높이 산 점, 또하나는 모든 시인들이 남북문제를 폐기하고 쓰잘데 없는 상상력의 이미지만을 누비는 현실에서 이같은 작품도 더욱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판단력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밀었다. 더욱 분발하고 정진하기를 바란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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