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 4

문근영 2015. 4. 15. 09:46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


<국제신문>


제목/4월

작가/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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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제목/눈물길

작가/김춘남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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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제목/조용한 가족

작가/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 앉아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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