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 3

문근영 2015. 4. 15. 09:45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


<세계일보>


제목/작은 손

작가/문 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

<문화일보>


제목/시월의 잠수함

작가/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