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당선작
활엽 카메라 외 4편
김정미
가을볕 옹송그린 굴참나무 숲에서 셔터 소리가 들린다.
늠름한 참나무 초록빛 이파리에 누가 야금야금 작은 구멍을 내고 있다.
겉늙은 피사체도 젊게 찍어내는 광합성 초박형 렌즈라?
(오늘 운세에 횡재수가 있더라니)
한쪽 눈을 감아야 눈을 뜨는 파인더, 점멸하는 기억의 붉은 창을 연다.
놀랍게도 작은 잎사귀 한 장에 커다란 굴참나무 한 그루 들어 있다.
갈래갈래 찢어진 고랑을 따라
무수한 팔과 다리들이 허우적거리며
까마득한 벼랑 끝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쩍쩍 갈라진 껍질에도
흰털 돋아난 잎맥에도
빽빽하게 씌워진 메뉴얼.
읽어도 알 수 없는 비책들이
바싹 마른 갈잎 필름에 둘둘 말려 있다.
그 순간이었을까?
외눈박이 바람이 번쩍 플래시를 터뜨리며
굴참나무 뻥 뚫린 뼛속을 환히 비춘다.
먼지의 방
멀쩡하던 청소기가 말썽을 부린다. 닥치는 대로 삼키는 놈의 식욕에 언젠가 탈이 나지 싶더니 드디어 숨을 헉헉 토해놓는다. 꽉 조인 나사를 풀자 시커먼 내부가 흉물스레 드러난다. 먼지가 전부인 주머니 속, 양복단추빈혈약유리파편몽당연필압정과자부스러기바퀴벌레 온갖 잡동사니들이 궁핍한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엮어 튼튼한 둥지를 짓고 있다. 불룩해진 자루는 자궁처럼 먼지의 알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다. 잿빛 둥지에 가만히 손가락을 넣어본다. 뾰족한 부리가 톡톡 살갗을 쫀다. 하얗게 일어나는 살비듬, 숨이 막힌다.
햇살이 기웃거리자 착한 먼지들이 반색을 하며 날아오른다. 한 줌 먼지로 돌아가는 세상, 그들이 만든 방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아늑하고 편하다.
긴꼬리삼광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삼광조가 날아오른다
작은 몸통에 몇 배 긴 꼬리가 날렵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고 날자
여름 숲은 순식간에
미끄러운 바다로 헤엄쳐 들어간다
새의 짙은 코발트색 눈매는
수직의 파도를 헤치고 나간다
오래 전 물 속에 뿌리내린 나무들
간지러운 겨드랑이에는 이제 막 눈을 뜬
작은 물고기들이 입질을 하고 있다
가지마다 물오른 비늘이 곤두서고
비릿한 수초 냄새 배인 숲으로
노을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가늘게 타오른 진초록 그리움이 잎새에 번지도록
식어버린 자궁벽 어딘가 작은 불씨가 깜빡거린다
긴꼬리삼광조가 바다를 벗어나자
구름이 턱을 고인 창 밖에서 지켜보던
양떼들도 노을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산파
검은 자갈돌 위에
흰목물떼새가 알을 낳는다
까만 돌이 햇빛을 받아
잘잘 기름을 흘리며 끓고 있는데
어미 새는 번갈아 다리를 들어올리며
알들의 주위를 돌고 있다
산도를 막 빠져나온 알들에게
나무 그림자가 짧은 곰배팔이라도 뻗으면
으름장을 놓으며 쫓고 있다
자갈돌은 어미 새의 맘을 아는지
정오의 햇살을 배터지게 먹고 또 먹는다
터질 듯 배를 불린 자갈돌은
어미 새와 약속한 포란을 한다
잘게 부순 햇빛 알갱이들이 껍질 속으로 스며든다
알들이 술렁거린다
날개가 꿈틀거린다
자갈돌의 숨죽인 마지막 일격에
딱! 껍질이 아픔을 쏟아낸다
자갈돌은 강물에 손을 씻고
어미 새를 부른다
자! 보세요
자일을 던지다
민달팽이가 15층 유리벽에 찰싹 붙어
빌딩 안쪽을 탐색한다
더듬이를 안테나처럼 길게 빼고
지워진 물길을 찾고 있다
조금씩 밀어올린 욕망이
까마득한 공포에 저를 걸 줄이야
헛발 딛은 바람이 곤두박질 칠수록
달팽이는 미끄러운 유리벽을 움켜쥔다
맨살로 만년설을 녹이기라도 할 듯
유리벽에 온몸을 밀착한다
등반은 길어지고
자웅동체의 몸뚱이가 놓인 슬라이더 위에
햇살이 긴 혀를 날름거린다
한순간에 녹아 떨어져내릴 것 같다
더듬이의 수신호가 점점 빨라지고
나는 목이 탄다
빙벽이 녹아 물이 맺힌 자리에
문득 암각이 나타난다
그래, 저 거야!
네 품에서 자일을 꺼내
던져!
위험한 꿈을 향해
[당선소감]
『문학과창작』에 당선이 결정되고 나니 그동안 시와 벌인 좌충우돌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시작된 저의 반란은 평범한 제 생활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습니다. 늦은 밤 시간에도 집을 비워야 했고 술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판에 박은 듯 비슷한 주변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각양각색의 문우를 만나면서 자연스레 제 안목도 넓어졌습니다. 처음엔 그냥 시가 좋았고 시를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시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오래된 애인처럼 저를 들들 볶아대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온 탓에 작은 들풀, 나무 이름 하나 변변히 아는 게 없는 제게는 시란 장르가 갈수록 나랑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거추장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포기할 생각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골치 아픈 시를 떠나기만 하면 전에 누리고 살던 내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맘처럼 되질 않았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무엇이 내부에서부터 들끓어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걸핏하면 들썩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들로 산으로 몸을 혹사하며 돌아다녀도 저의 병은 쉽게 낫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병이 바로 시에 대한 금단현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전 시인이라 불려지기엔 많이 부족하단 걸 압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방황을 아시고도 다시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무엇보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음을 세상이 다 알 수 있게 풀어진 제 마음의 고삐를 다잡아 시에 정진하겠습니다.
시를 쓴다고 소홀했던 아내 자리, 엄마 자리를 묵묵히 채워준 우리 가족들에게도 이 기회를 빌어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의 등단이 기쁨이길 바랍니다. 함께 한 문우들과 세심한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많은 선배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활엽 카메라 외 4편
김정미
가을볕 옹송그린 굴참나무 숲에서 셔터 소리가 들린다.
늠름한 참나무 초록빛 이파리에 누가 야금야금 작은 구멍을 내고 있다.
겉늙은 피사체도 젊게 찍어내는 광합성 초박형 렌즈라?
(오늘 운세에 횡재수가 있더라니)
한쪽 눈을 감아야 눈을 뜨는 파인더, 점멸하는 기억의 붉은 창을 연다.
놀랍게도 작은 잎사귀 한 장에 커다란 굴참나무 한 그루 들어 있다.
갈래갈래 찢어진 고랑을 따라
무수한 팔과 다리들이 허우적거리며
까마득한 벼랑 끝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쩍쩍 갈라진 껍질에도
흰털 돋아난 잎맥에도
빽빽하게 씌워진 메뉴얼.
읽어도 알 수 없는 비책들이
바싹 마른 갈잎 필름에 둘둘 말려 있다.
그 순간이었을까?
외눈박이 바람이 번쩍 플래시를 터뜨리며
굴참나무 뻥 뚫린 뼛속을 환히 비춘다.
먼지의 방
멀쩡하던 청소기가 말썽을 부린다. 닥치는 대로 삼키는 놈의 식욕에 언젠가 탈이 나지 싶더니 드디어 숨을 헉헉 토해놓는다. 꽉 조인 나사를 풀자 시커먼 내부가 흉물스레 드러난다. 먼지가 전부인 주머니 속, 양복단추빈혈약유리파편몽당연필압정과자부스러기바퀴벌레 온갖 잡동사니들이 궁핍한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엮어 튼튼한 둥지를 짓고 있다. 불룩해진 자루는 자궁처럼 먼지의 알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다. 잿빛 둥지에 가만히 손가락을 넣어본다. 뾰족한 부리가 톡톡 살갗을 쫀다. 하얗게 일어나는 살비듬, 숨이 막힌다.
햇살이 기웃거리자 착한 먼지들이 반색을 하며 날아오른다. 한 줌 먼지로 돌아가는 세상, 그들이 만든 방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아늑하고 편하다.
긴꼬리삼광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삼광조가 날아오른다
작은 몸통에 몇 배 긴 꼬리가 날렵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고 날자
여름 숲은 순식간에
미끄러운 바다로 헤엄쳐 들어간다
새의 짙은 코발트색 눈매는
수직의 파도를 헤치고 나간다
오래 전 물 속에 뿌리내린 나무들
간지러운 겨드랑이에는 이제 막 눈을 뜬
작은 물고기들이 입질을 하고 있다
가지마다 물오른 비늘이 곤두서고
비릿한 수초 냄새 배인 숲으로
노을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가늘게 타오른 진초록 그리움이 잎새에 번지도록
식어버린 자궁벽 어딘가 작은 불씨가 깜빡거린다
긴꼬리삼광조가 바다를 벗어나자
구름이 턱을 고인 창 밖에서 지켜보던
양떼들도 노을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산파
검은 자갈돌 위에
흰목물떼새가 알을 낳는다
까만 돌이 햇빛을 받아
잘잘 기름을 흘리며 끓고 있는데
어미 새는 번갈아 다리를 들어올리며
알들의 주위를 돌고 있다
산도를 막 빠져나온 알들에게
나무 그림자가 짧은 곰배팔이라도 뻗으면
으름장을 놓으며 쫓고 있다
자갈돌은 어미 새의 맘을 아는지
정오의 햇살을 배터지게 먹고 또 먹는다
터질 듯 배를 불린 자갈돌은
어미 새와 약속한 포란을 한다
잘게 부순 햇빛 알갱이들이 껍질 속으로 스며든다
알들이 술렁거린다
날개가 꿈틀거린다
자갈돌의 숨죽인 마지막 일격에
딱! 껍질이 아픔을 쏟아낸다
자갈돌은 강물에 손을 씻고
어미 새를 부른다
자! 보세요
자일을 던지다
민달팽이가 15층 유리벽에 찰싹 붙어
빌딩 안쪽을 탐색한다
더듬이를 안테나처럼 길게 빼고
지워진 물길을 찾고 있다
조금씩 밀어올린 욕망이
까마득한 공포에 저를 걸 줄이야
헛발 딛은 바람이 곤두박질 칠수록
달팽이는 미끄러운 유리벽을 움켜쥔다
맨살로 만년설을 녹이기라도 할 듯
유리벽에 온몸을 밀착한다
등반은 길어지고
자웅동체의 몸뚱이가 놓인 슬라이더 위에
햇살이 긴 혀를 날름거린다
한순간에 녹아 떨어져내릴 것 같다
더듬이의 수신호가 점점 빨라지고
나는 목이 탄다
빙벽이 녹아 물이 맺힌 자리에
문득 암각이 나타난다
그래, 저 거야!
네 품에서 자일을 꺼내
던져!
위험한 꿈을 향해
[당선소감]
『문학과창작』에 당선이 결정되고 나니 그동안 시와 벌인 좌충우돌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시작된 저의 반란은 평범한 제 생활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습니다. 늦은 밤 시간에도 집을 비워야 했고 술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판에 박은 듯 비슷한 주변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각양각색의 문우를 만나면서 자연스레 제 안목도 넓어졌습니다. 처음엔 그냥 시가 좋았고 시를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시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오래된 애인처럼 저를 들들 볶아대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온 탓에 작은 들풀, 나무 이름 하나 변변히 아는 게 없는 제게는 시란 장르가 갈수록 나랑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거추장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포기할 생각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골치 아픈 시를 떠나기만 하면 전에 누리고 살던 내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맘처럼 되질 않았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무엇이 내부에서부터 들끓어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걸핏하면 들썩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들로 산으로 몸을 혹사하며 돌아다녀도 저의 병은 쉽게 낫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병이 바로 시에 대한 금단현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전 시인이라 불려지기엔 많이 부족하단 걸 압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방황을 아시고도 다시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무엇보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음을 세상이 다 알 수 있게 풀어진 제 마음의 고삐를 다잡아 시에 정진하겠습니다.
시를 쓴다고 소홀했던 아내 자리, 엄마 자리를 묵묵히 채워준 우리 가족들에게도 이 기회를 빌어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의 등단이 기쁨이길 바랍니다. 함께 한 문우들과 세심한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많은 선배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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