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컸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시 : 그 노인이 지은 집
길상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청림문학 동인.
그 노인이 지은 집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
'다시 보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02년 [동아일보] 시 당선작 (0) | 2015.04.10 |
---|---|
[스크랩] 2002년 [경향신문] 시 당선작 (0) | 2015.04.10 |
[스크랩] 2001년 중앙일보 당선작 (0) | 2015.04.09 |
[스크랩] 2001년 조선일보 당선작 (0) | 2015.04.09 |
[스크랩] 2001년 세계일보 당선작 (0) | 2015.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