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2년 [동아일보] 시 당선작

문근영 2015. 4. 10. 10:11

2002년 [동아일보] 시 당선작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당선소감>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나의 깜냥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 견성, 내가 시(詩)를 짝사랑할 것이라 누군들 예상했었나.
대학 1년 때 백지 상태에서 처음 읽었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그리고 시작된 남독의 몇 년, 군대시절 몰래 건빵주머니에 시집을 넣어 다니면 읽든, 읽지 못하든 내 허벅지는 로보캅처럼 단단해졌었다.
유년시절 구로공단 부근 파란대문 집을 생각한다. 염색공장까지 길게 이어지던 개나리담장, 그 길을 따라 출근했다가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서 귀가하던 셋방 누나들, 항상 먼 곳으로만 돈벌러 떠나시던 아버지. 그 모든 아픔에 대해 여전히 나는 겨우 짐작만 할 뿐이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는 한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언제나 타인의 고통은 내게 두눈 뜨고도 읽을 수 없는 점자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만질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싶어했다. 캄캄하던 시절 혹 그런 것이 시의 육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갓난아이의 꼭 쥔 주먹 같은, 땅바닥에 박혀있는 돌멩이 같은 태초의, 고통의 냄새가 나는 ‘우리나라 글자’가 나는 좋았다. 그것은 체험의 깊이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차제에 한 번 더 명심해 둔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얼음벽돌집을 짓고 그 속에서 숨죽이며 있느라 미처 고백하지 못했을 뿐. 위태로운 내 사랑의 영토. 그곳 성소(聖所)의 주인이신 할머님, 큰 스승이신 할아버님, 부모님과 여동생, 두 분 이모님, 일하 삼촌, 진무, 진서,‘북어국을 끓이는 아침’에 동기들, 문학회 식구들에게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으며 망설이셨을, 사숙하던 선생님들께 꼭 좋은 글로써 보답하고 싶다. 겨우 시작인 것이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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