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2년 [조선일보] 시 당선작

문근영 2015. 4. 10. 10:12

2002년 [조선일보] 시 당선작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1960년 경기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현 대성N스쿨 평택분원 영어 강사 ▲안성시 공도 우림아파트 101-301



심사평 :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감추지 않는 패기 돋보여

높고 고른 수준의 시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규격적인 훈련을 받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읽는 일은 동시에 다소간 괴롭다. 대체로 즐거우면서도 이따금씩 괴로운 작업 끝에 우리는 이윤훈씨의 ‘옹이가 있던 자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가 우수하지만, 그가 당선자가 된 까닭은 역설적으로 ‘돈황으로 가는 길’, ‘아씨시 성 프란시스코와 마주하여’, ‘주인님전 상서’ 등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들 덕택이다. 거기서 그는 엉뚱한 상상력과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 스타일을 감추지 않는 패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 남아 있는 패기이지만, 더욱 힘을 길러 세상을 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키워가기 바란다. 이민, 김미영, 최찬상, 문신 씨등도 상당한 경지에 근접해 있는데 문제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자기의 언어 발견이다. 가정속의 일상성, 시어의 상투성, 운률이 결핍된 산문시 애호 현상 등등은 이를 위해 싸워야할 대상들로서 시인을 동경하는 분들이 깊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당선소감>
가끔은 화려한 문신으로 누군가에 각인되고 싶다
기쁜 소식은 나에겐 오랜 기다림이었다. 딴 생각말고 10년만 노력하라던 남편의 말, 뛰려 말고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 걸음마부터 배우라며 내 손을 잡아 학교에 입학 시켜주던 남편에게 이제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늘 미안했었다. 며칠 전,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보며 여기쯤에서 이제 날개를 접어야하지 않을까? 수업 중인데도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붕붕댔다. 저 아이들에게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눈처럼 내가 기다리는 기쁜 소식이란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글 쓴답시고 소홀한 주변에도 미안하여 이제 날개를 접고 동면을 하고 싶었다. 아니, 내가 쓰는 글들이 어줍잖다고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당선 소식은 나에게 동면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채찍이 되었다. 이제 계속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변함 없이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지도선생님과 금초문학회, 그리고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께 감사 드리며, 나에게 이 세상을 통째로 선물해주신 나의 어머니, 묵묵히 바라보던 남편, 또한 글 쓰는 엄마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나의 사랑스런 아들과 딸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며 나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모여든 논술반 아이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심사위원 선생님! 제가 이렇게 큰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