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심사평
쉬운 언어로 깊고 넓은 뜻 표현
최종심에서 심사위원들은 네 응모자의 작품에 주목했다. 안여진씨의 응모작은 언어가 맑고 신선하다. 사물을 접하는 감각도 날카롭다. 그러나 주제가 새롭지 않고 깊이도 부족하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상투적 표현에 의지하는 습관이 있다.
유승하씨는 현실을 분석하는 눈이 예리하고 필력도 훌륭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 주제도 깊고 다양하다. 이따금 사실의 묘사와 은유적 표현 사이에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다.
김금숙씨의 응모작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가장 오래 끌었던 작품이다. 삶의 깊은 체험이 주제와 언어 속에 드러나고 작품을 쓰는 태도가 진지하며 표현도 힘차다. 그러나 여성의 몸이나 임신과 생리에 관한 주제가 현금 시단의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당선자인 문성해씨는 경쾌한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쉬운 언어로 드러내는 뜻은 깊고 넓다. 사물의 한 귀퉁이를 가볍게 건드려 의미 하나를 폭발하게 하는 이 능력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당선작인 ‘귀로 듣는 눈’에서 읽게 되는 것은 시각과 청각 간의 공감각적 환치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실현되지 못한 채 무효가 되어버린 모든 선의와 희망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이 있다. 다른 작품 ‘수건 한 장’에서도 인간의 삶과 사물이 어떻게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를 감동 깊게 서술한다. 그가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당선자의 문운을 빌며 모든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김종해·황현산>
당선소감
싸움닭처럼 달려드는 삶이 고맙다
긴하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새벽이 찾아왔다. 베란다에 널어둔 크고 작은 빨래들이 시커멓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식구들의 몸뚱이가 빠져나간 빨래들이 무슨 문지기들처럼 집을 지키고 있다. 이 조그만 집에 참 그래도 많은 것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 살고 있는 것들이 그립기라도 한 듯 이삼일 건너 한번씩 손님들이 찾아온다. 내게 찾아온 이들이 고맙다. 내게 찾아온 가족이 고맙고, 앞으로 태어날 새 가족도 고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다 뒤통수 치는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이 고맙고, 작은 창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아침 햇빛이 고맙고, 내 생의 동반자인 병마저 고맙고, 무엇보다 싸움닭처럼 달려드는 삶이 고맙다.
그동안 많이 자질구레해져 있었다. 내 이런 변화에 많이 놀라곤 했던 친구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들이 우리들 앨범에 압사되어 있더라도 이제는 용서해 줄 수 있겠지?
그 지명만 나와도 가슴이 벌렁이는 대구, 그곳에 사는 벗들이 보고 싶다. 아직도 벗들은 눈이 오면 낄낄대며 팔공산을 오르고 있을까? 우리집 담장은 저를 훌훌 넘던 여자애를 아직도 기억할까?
돌아보면 내 시를 키워 온 고마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기쁨을 오롯이 그들의 몫으로 돌린다. 이제는 내 시를 담담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 시흥에 계시는 참 많은 분들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선하여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신문사에 넙죽 고마움을 전합니다. 참 좋은 시인, 행복한 시인으로 태어나서 거듭거듭 보답하겠습니다.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심사평
쉬운 언어로 깊고 넓은 뜻 표현
최종심에서 심사위원들은 네 응모자의 작품에 주목했다. 안여진씨의 응모작은 언어가 맑고 신선하다. 사물을 접하는 감각도 날카롭다. 그러나 주제가 새롭지 않고 깊이도 부족하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상투적 표현에 의지하는 습관이 있다.
유승하씨는 현실을 분석하는 눈이 예리하고 필력도 훌륭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 주제도 깊고 다양하다. 이따금 사실의 묘사와 은유적 표현 사이에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다.
김금숙씨의 응모작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가장 오래 끌었던 작품이다. 삶의 깊은 체험이 주제와 언어 속에 드러나고 작품을 쓰는 태도가 진지하며 표현도 힘차다. 그러나 여성의 몸이나 임신과 생리에 관한 주제가 현금 시단의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당선자인 문성해씨는 경쾌한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쉬운 언어로 드러내는 뜻은 깊고 넓다. 사물의 한 귀퉁이를 가볍게 건드려 의미 하나를 폭발하게 하는 이 능력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당선작인 ‘귀로 듣는 눈’에서 읽게 되는 것은 시각과 청각 간의 공감각적 환치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실현되지 못한 채 무효가 되어버린 모든 선의와 희망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이 있다. 다른 작품 ‘수건 한 장’에서도 인간의 삶과 사물이 어떻게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를 감동 깊게 서술한다. 그가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당선자의 문운을 빌며 모든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김종해·황현산>
당선소감
싸움닭처럼 달려드는 삶이 고맙다
긴하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새벽이 찾아왔다. 베란다에 널어둔 크고 작은 빨래들이 시커멓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식구들의 몸뚱이가 빠져나간 빨래들이 무슨 문지기들처럼 집을 지키고 있다. 이 조그만 집에 참 그래도 많은 것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 살고 있는 것들이 그립기라도 한 듯 이삼일 건너 한번씩 손님들이 찾아온다. 내게 찾아온 이들이 고맙다. 내게 찾아온 가족이 고맙고, 앞으로 태어날 새 가족도 고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다 뒤통수 치는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이 고맙고, 작은 창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아침 햇빛이 고맙고, 내 생의 동반자인 병마저 고맙고, 무엇보다 싸움닭처럼 달려드는 삶이 고맙다.
그동안 많이 자질구레해져 있었다. 내 이런 변화에 많이 놀라곤 했던 친구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들이 우리들 앨범에 압사되어 있더라도 이제는 용서해 줄 수 있겠지?
그 지명만 나와도 가슴이 벌렁이는 대구, 그곳에 사는 벗들이 보고 싶다. 아직도 벗들은 눈이 오면 낄낄대며 팔공산을 오르고 있을까? 우리집 담장은 저를 훌훌 넘던 여자애를 아직도 기억할까?
돌아보면 내 시를 키워 온 고마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기쁨을 오롯이 그들의 몫으로 돌린다. 이제는 내 시를 담담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 시흥에 계시는 참 많은 분들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선하여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신문사에 넙죽 고마움을 전합니다. 참 좋은 시인, 행복한 시인으로 태어나서 거듭거듭 보답하겠습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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