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유종호, 신경림
장만호의 시는 우선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그 나름의 리듬도 갖고 있다.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화한이며 안타까움, 그리움이며 깨달음 같은 시적 내용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남의 것이 아니고 진짜 자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든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수유리에서'가 가장 빛났는데,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같은 비유도 시에 생기를 더한다. 밝고 환한 분위기의 '원정'은 생명감으로 충일해 있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당선시 : 水踰里에서
장만호
1970년 전북 무주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과 재학중.
水踰里에서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러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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