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입어 해진 스웨터를 걸치고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어머니는 늘 시간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제 어머니는 시간의 먹잇감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귀를 먹어치웠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은
왼쪽 발목 관절을 먹는 시간의 입가에
어머니가 먹은 시간이 질질 흘러내렸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기억을 먹어버리고
안경 너머 짓무른 눈에는 끈끈한 침을 발라놓았다
이 빠져 흉한 사기그릇처럼
군데군데 이빨마저 먹어치웠다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육신
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
오늘도 어머니는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기다렸다는 듯
시간은 어머니 오른쪽 무릎 관절에 입을 대었다
먹히던 시간이
무서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대체로 정진혁의 시들은 ‘가족’을 노래할 때 그 어조가 웅숭깊다. 그의 시에서 20년간 한전(韓電) 수금사원으로 일하며 육남매를 길러낸 아버지(〈아버지와 자전거 1〉), “서러운 날에 한련화 환한 꽃잎 따 넣어 / 밥 비벼 주던 누나”(〈두고 온 것이 있다〉), “내 어릴 적 항아리 위 정한수 앞에서 / 손 비비던 어머니”(〈들리지〉), 아름다운 봄날 죽어서 뼛가루가 되어 뿌려진 “무화과 닮은 작은 누나”(〈무화과〉) 등과 같이 그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드물지 않다. “조금 애처로운 헐한 어제와 / 싱거운 단어 사이 밴 소금기”(〈간잽이〉)는 실직을 하고 임시직으로 부유하며 마음앓이를 하는 시인의 삶이 어깨에 얹는 고통의 등가물이다. 가족과 상관된 기억들을 다룬 시의 어조가 한결같이 애련하게 젖어 있는 것은 “변두리 동네”의 쓰리고 짜디짠 가난을 함께 겪어 낸 탓일 게다. 그래서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는 노모에 관해 적은 시다. 노모를 시의 제재로 쓰되 사사로운 가족 서사를 넘어서서 인류 보편의 비극적 경험으로 그 인식을 확장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잡아끈다.
젊음을 노래하는 시는 많지만, 늙음을 노래하는 시는 드물다.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는 드물게 늙음을 노래하는 매우 빼어난 시다. 노경(老境)에 대한 사실주의적 관찰은 삶의 핵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젊음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늙음은 시간의 마법이 필요하다. 미국 시인 메이 스웬슨(1913~1989)은 “젊기는 쉽다.(모두 젊다, / 처음엔.) 쉽지 않다 / 늙기는.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고 썼다. 이 평범하고 단순한 통찰이 달구어진 쇠꼬챙이가 되어 뇌의 어느 한쪽을 뚫고 지나가는 듯하다. 이 시의 주체는 시간이다. 시간에 잡아먹히는 노모는 객체다. “오래 입어 해진 스웨터를 걸치고 /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저녁을 달게 먹는 노모는 하나의 객체로써 남루하고 동시에 애처롭다. 문득 저 어린 시절 가곡으로도 불렀던 노산 이은상의 〈장안사(長安寺)〉라는 시가 떠오른다. “장하던 금전(金殿) 벽우(僻隅) 찬재 되고 남은 터에 /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금전’은 금전옥루(金殿玉樓)의 줄인 말일 터. 규모가 아무리 크고 화려한 전각과 누대라도 억겁 시간의 힘을 이길 재간이 없다. 이루고 또 이룬 것이 폐허다. 어느덧 찬 재 되어 금전옥루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시인은 크고 화려했던 절이 감쪽같이 사라진 현장에서 그 절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의 흥망에 대한 단상이 불러일으킨 비애와 덧없음을 탄식한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젊은 시절의 인생은 그야말로 금전옥루와 같이 늠름하고 빛나지 않았던가. 늙으면 이것들은 덧없이 사라진다. 누가 인생을 고귀하다고 말하는가. 사람은 딱딱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말랑말랑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랑말랑한 것에서 수분이 빠지고 탄력이 죽으면 피부는 쪼글쪼글해진다. 마찬가지 이치로 인해 가을의 어스름 저녁에 찬연하게 빛나던 황국과 알록달록한 여뀌들은 시들어 땅에 지고, 푸른 물 출렁이며 흐르던 강물도 말라 거친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시간은 야수의 식성(食性)을 가졌다. 모든 것을 찢고 씹고 부숴뜨려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보라, 시인은 시간이 저지르는 만행에 진절머리를 치며 그 사태의 전모를 일러바치고 있지 않은가. 시간은 노모의 귀를 먹고, 왼쪽 발목 관절을 먹고, 기억과 눈을 먹어버린다. 귀와 발목 관절과 기억과 눈을 잃은 팔순 노모는 듣고 보고 걷는 일에 서툴러진다. 노화현상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생물학적 운명이다. 그 운명은 비참하고 끔찍하다. 노모의 입가에 침이 질질 흘러내린다거나, “안경 너머 짓무른 눈에는 끈끈한 침”이 흐르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시간이다. 이렇듯 시간의 폭력성은 노년기 신체 기능의 퇴행과 장애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람에겐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어기제도 없다. 다만 우리는 시간의 악행들과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리고 오로지 그것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이상의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서 인간의 비극이 확연해진다.
좋은 시는 사물과 존재의 핵심을 성찰하되, 그 진실에 직면하는 고통의 순간을 미적 쾌감의 순간으로 바꿔놓는다. 아무리 끔찍한 내용이 담겼더라도 좋은 시를 읽고 난 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는 시간이 제 속에 감추고 있는 무시무시한 속성, 즉 폭력성과 야만성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다. 어느 순간 시간은 제 속내를 뻔뻔스럽게 드러내며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의 팔순 노모다. 시인은 바로 경악의 눈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고 그 참혹한 현장을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이 시를 읽은 오후 내내 오랜만에 제대로 잘 쓴 시를 읽은 탓에 내적 충일감으로 기분이 좋았다.

정진혁(1960~ )은 청주에서 태어났다.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신인상을 받고, 2009년 제1회 구상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게 내가 정진혁 시인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성정이 어떤지, 그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우연히 어디엔가 그의 시 한 편이 소개된 걸 읽고 좋아서 그의 시집을 샀다. “부평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3개월의 계약서에 / 햇살처럼 도장을 찍고 돌아온 날 / 와와 흩어지는 소금 알갱이 가슴에 쓰리다”(〈간잽이〉)라는 시구에 따르면 그의 신분은 3개월 시한의 기간제 교사다. “바닥난 통장과 빚”은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교직노동자의 불가피한 그늘이다. 높은 꿈과 궁핍의 현실 사이에서 삶을 살아내는 일은 늘 “비탈길”을 올라가는 고단함이거나, “터널”을 지나가는 불안의 시간일 터이다. 그 고단함과 불안의 시간을 묵묵히 감내할 때, 속꽃을 피우는 무화과(無花果)와 같이 삶의 안쪽에는 어떤 무늬들이 아로새겨지는데, 그게 바로 정진혁의 시들이다.
사진 : 김선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