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5

문근영 2014. 4. 26. 11:20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5
 
나민애
□ 없는 것을 꿈꾸기
 
- 김재진, 「산꽃 이야기」, 《유심》 2011. 1/2월호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 상상, 몽상, 환상-이 모든 상상계의 작동은 그야말로 허망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믿는 점에 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생각의 작용은 비현실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것이 비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재하는 것들의 세계를 구성해내는 아이러니함이야말로 창조의 근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없는 것을 꿈꾸고, 불가능한 것을 상정하며, 무의 세계를 유의 세계로 돌려세우는 것은 모든 창작, 예술, 문화의 공통 기반인 것이다.

김재진 시인의 작품에서 모든 문장은 ‘-할 수 있다면’의 가정법으로 끝을 맺는다.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사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사실 느낄 수 없지만), 사라져버린 늑대의 산을 볼 수 있다면(사실 볼 수 없지만) 과연 어떨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정법을 미래 희망에 대한 막연함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가정법의 원망(願望) 발화는 간절함의 정도에 따라 단순 발화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은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행복하고 불행한 자이다. 또한 이 불가능한 요청 속에서는 때로 아름다운 구조와 진리와 미학이 발견되기도 한다. 뻔한 현실 속을 살아가다 이런 기적같은 순간을 만난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적이 우연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이것은 ‘-할 수 있다면’의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가정법이 좌절하지 않은 필연적 소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불가능의 무게
 
- 이은규, 「별들의 시차」, 《현대시》 2011. 1.
 
그가 음독(飮毒)하며 중얼거렸다는 말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천문학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정치를 했다는 이력으로 한 죽음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눈이 아프도록 흩뿌려진 별 아래
당신의 몸 속 세포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수가 일치할 거라는 상상이 길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傳言)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어떤 죽음은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이 꼬리를 그리는 건
그 속에 담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
 
 
* 이은규 시인은 등단한 지 오래지 않은 시인, 그래서 아직 신인의 범주로 구분되는 젊은 시인이다. 그렇지만 이력을 떼어놓고 바라보았을 때 이 시인의 특징은 사유의 깊이에서 발견되며 이 깊이감이 전체적으로 진지함과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아마 그는 고뇌나 침묵, 또는 침잠에 관련된 내면의 늪을 소유한 듯하다. 그리고 이 늪의 속성으로 인해 이 시인은 젊은 혈기가 쉬 발산되기를 거부하고 빛을 끌어모아 ‘사유의 소(沼)’를 만들고 있다.

시를 꿰어나가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늪의 형질이 엿보인다면, 작가론적으로 접근할 때 이은규 시인은 차라리 많은 아픔을 속으로 삭이는 유형의 시인이다. 삭힘은 때로 발효나 형질 변형과 같은 변모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삭힘은 많은 양의 것(하고 싶었던 말 또는 할 수 있었던 말, 분노나 갈등, 기쁨이나 번민 같은 감정)을 녹여 아주 적은 것만을 남긴다.
 
사실 이 두 속성은 이은규 시인에게 같은 말이리라. 그는 가볍게 떠돌 수 있는 발화의 조건들을 무겁게 가라앉혀 그것을 통해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만을 건져내려고 하는 발효의 시인이다. 등 뒤에 이 무거움을 지고 가는 젊고 고운 이 시인은 스스로 젊고 곱기를 원하지 않는다. 바라건대, 그 길항과 모순이 시인에게 더 큰 고난이자 삶의 유일한 낙이 되기를.
 
 
□ 그해 겨울은 추웠네
 
- 이정록, 「물뿌리개 꼭지처럼」, 《유심》 2011. 1/2월호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증거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낀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 직전 해만큼 추웠던 계절이 있었을까. 기상청에 기록되기로 올해의 한파는 기록적이었고, 우리의 사회사의 기록에서나 마음사의 기록에서나 이번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던 한 해였다. 그리고 세밑이 지나 음력설을 보냈어도 아직 추운 계절은 끝나지 않은 듯, 또는 언제도 끝나지 않을 듯 하다.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이정록 시인의 위 작품은 잘 대변해내고 있다. 처음에 그의 작품은 식물에 물주기라는 실제 경험에서 시작한다. 베란다나 작은 텃밭에 물을 주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이면서도 화평과 조화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다. 식물에 물을 주는 것은 나의 이익을 바란 것이기 전에 생명과 생명과의 일대일 대면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한껏 낮아진 자세로 물을 주다보면 자연스러운 반성도, 기쁨도, 내면의 다스림도 가능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초심으로 돌아가, 생명을 본받고 물뿌리개를 본받아 인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사랑스러운 다짐이 실행되기도 전에 물뿌리개는 한파를 맞아 꽁꽁 얼어 버렸다. 사실 그 물뿌리개는 반성적 성찰에 의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시인은 식물에 물을 줄 때 마음을 열고 다른 생명들과 조우하자고 다짐했건만 아마도 실제 인간관계에서 그 일은 실패했던 모양이다. 한겨울의 물뿌리개처럼 소통의 통로가 막혀 시인은 홀로 고립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비단 시인뿐일까. 이제 그만 ‘얼음’에 대해 ‘땡’을 외치고 싶은 계절이다.
 
 
□ 잃어버린 조상신에 대해
 
- 조창환, 「추석 무렵」, 《미네르바》 2010. 겨울
 
그 뱀, 죽어 좋은 곳으로 갔을까?
오십 년 전 영등포, 영남초등학교 앞 골목
삼십 년 된 적산가옥 묵은 집 팔린 날
누렇고 검은 큰 뱀 한 마리 대문 옆 창고 안에
또아리 틀고 앉았었다, 뱀은 너무 점잖아서
떡 한 시루 갖다 놓아도 아주 조금밖에 떼어 먹지 않았다
-업구렁이 잘 모셔야 한다
어머니는 두 손바닥 뜨거워지게 빌었지만
두렵고 섬뜩하고 징그럽던 저녁 무렵
아랫방에 세 살던 창수네, 동네사람들 이끌고 와서
-저거 나가면 이 집 망할 걸
업구렁이 구경하며 수군거렸다
대동아 전쟁 때도, 팔일오 해방 때도, 육이오 사변 때도
삼십 년 넘은 적산가옥 지키던 구렁이가
계약서에 도장 찍은 초가을 늦은 밤
식구들 모여 앉아 이 집 버리고 멀리 떠나기로
작정하고 손가락에 침 묻혀 계약금 세던 걸
어찌 알았을까, 의젓하고 늠름하고 점잖던
그 뱀! 집지킴이 늙은 구렁이
다음날 우리 식구 외출하자 동네 땅꾼 찾아와
섬돌 밑의 암컷까지 잡아 자루에 담아 갔는데
왜 추석 무렵 그 뱀 그리워질까?
뱀은 다만 한세상 잘 살고 떠나갔을 뿐인데
어둠 속에서 집 지키며 주인과 함께 숨쉬던
그 뱀! 배신한 주인식구들 미워 자살했을까?
참았던 시간 너무 지루해
비 내린 뒤끝의 무지개나 구경하고
죽어주기로 작정했을까?
그 뱀 삶아 먹은 폐병쟁이는 몇 해나 더 살다
저 세상에서 구렁이 혼령 만났을까?
구렁이 혼령과 폐병쟁이 혼령이
멋쩍게 웃으며 악수하는 추석 무렵
닝닝한 적막이 달빛을 가리운다
 
 
* 추석 무렵의 달빛은 깊고 풍성하고 진하다. 그래서인지 추석 무렵의 달빛은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소망과 사람과 기억을 담고 있는 듯하다. 조창환 시인의 인용 작품은 추석 달빛이 추억을 자극하고, 추억이 구렁이를 자극하고, 구렁이의 기억이 유년을 자극하며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난 추석보다 구정의 기억이 더 가까운 이 시점에 왜 이 작품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구렁이’ 때문이다.
 
옛적의 초가에는 한겨울에도 뜨뜻함이 유지되는 지붕 밑이나 돌담 밑에 구렁이가 살았다. 모든 집에 구렁이가 살았던 것은 아니고, 구렁이가 산다고 해도 모든 집이 알아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집주인이 살라고 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나가라고 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구렁이는 지붕 이엉을 가는 와중에 마당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따뜻한 날 돌담에 올라가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우연히 발견된 구렁이의 존재는 그 집을 낡아도 꽤 행복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구렁이는 오욕의 파충류가 아니라 집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로, 점잖고 덕스러운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렁이가 사는 집이라는 사실은 마음 한 켠을 뿌듯하게, 조금은 든든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구렁이가 식용으로 함부로 포획되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이 시의 중심축이다. 그런데 비단 사라진 것은 구렁이뿐만이 아니다. 이 구렁이야말로 조상신을 비롯해 문지방신, 부엌신, 빗자루신 등과 같이 사라진 수호령들의 대명사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신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구정이 돌아왔지만 점차 많은 이들이 조상신을 잊고 그 자리에 비행기신이나 스키장신 등 개인적 신을 채워놓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점에 오래 전에 존재했던 실물의 신, 구렁이를 풀어놓는 이 작품은 고풍스럽게 애상적으로 다가온다.
 
나민애  편집위원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문화저널 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