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문제작 ] 자연시는 변화한다 / 나민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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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과 자연의 관계 현재 어느 지면에서건 ‘자연’에 관한 시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마치 자연과 시는 영원한 짝이었고, 또 영원한 짝일 것만 같다. 하지만 자연이란 과연 언제까지나 우리 시의 잦은 주제가 되어 줄까. 인간은 물론 서정마저 변화하는 현시점에서 판단할 때 둘 사이의 관계는 부동의 그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연 자체를 다루거나 거기에 의탁하여 서정을 노래하는 시 쓰기 방식은 이제 점차 줄어들거나 변화할 수밖에 없다. 자연에 관하여 생래적인 감각을 지닌 시인들이 더 이상 세대라는 무리를 지어 태어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산천초목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돌과 강과 바람과 달에 대해 명상을 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자연을 경험적으로 먹고 자라난 시인들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 자연시 양상과 범주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점이다.
육체와 정서를 맘껏 열어 자연의 일부로 자랐던 시인과 인공 자연 속에서 자란 시인의 자연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 그들의 몸 안에는 자연이 각인되어 존재한다. 따라서 시에 자연을 재생해 낼 때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갈 수 있다. 이것을 내재적인 자연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을 지닌 시인의 세대는 1970년대 출생 이후에는 확연하게 줄어든다. 1960년대 태생의 경우에는 함민복, 이정록, 박형준 등과 같이 언급 가능한 시인이 더 풍성하다. 그러다가 70년생인 문태준, 손택수, 73년생 길상호 시인, 74년생 신용목 시인 등을 지나서 1980년대생 이후의 신인을 헤아려 보면 자연에 대한 자연스러운 재생 방식은 점차 드문 광경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줄어든 자연의 감각을 대신해서 자의식, 도시 문명의 현실 의식, 또는 절망 및 환상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인 가운데는 유병록 시인 등과 같이 자연의 젊은 어법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고,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새롭게 개발되는 측면도 있다. 분명한 점은 변화가 더 확연해지리라는 사실이다. 천 년 전 《시경》의 시대부터 자연이라는 주제는 항구불변하여 시인의 영원한 벗인 줄 알았더니, 50년이 채 못 된 근미래에 희귀한 벗이 되거나 ‘다른 자연’으로 변모할지 모른다.
참고로 매슈 아널드(1822~88)는 퍽 이른 시기에 “오, 싱싱하고 맑은 정신이 반짝이는 템스 강처럼 삶이 즐겁게 흐르던 시대에 태어난 자여, 현대생활이라는 이 이상한 질병이 유행하기 전에 태어난 자여.”(장시 〈학생 집시〉, 1853)라고 읊은 바 있다. 아널드가 템스 강을 원년으로 삼아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인간을 나눴다면 우리의 시인들은 전반적으로 템스 강과 현대 질병의 사이에 분포해 있다. 누군가는 자연에서 태어나 질병을 배웠고, 누군가는 도시 인큐베이터에서 태어나 자연을 배웠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화가 필연적 조류라고 해도 시인에게는 필연을 회의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같은 근거에서 우리는 현재 내재적인 자연감각을 흔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라고 음미해야 한다.
직전 《유심》 유심시단에 실린 이은봉 시인의 작품이다. ‘굴뚝새’라든가 ‘나주볕’같이 곱지만 소외된 우리말에 생명을 불어넣는 묘미가 있거니와 네 편의 장면이 마치 그린 듯하다. 구체적으로 이 회화적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한 행씩을 할당해서 장독대의 사계(四季)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하고 있다. 그런데 특정한 단 한 해의 사계절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시의 경우 장독대의 사계는 무릇 수년간 축적된 사계의 보편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랫동안 축적된 시절과 기억은 시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될 수 있었고 그것이 부재하는 시점에 와서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물론 유년 시절이나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달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시 안으로 호출해 내는 방식의 문제이다. 장독대로 표상되는 자연 공간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모순적이며 영구불변한 곳이다. 기억 속에 존재하므로 훼손이 불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방문이나 회귀 역시 불가능하다.
이때 우리가 취할 바는 가능한 세계냐 불가능한 세계냐는 선택에 있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자기 안에 회귀시키느냐 마느냐의 행위에 있다. 다시 말해 그 흐름을 온몸으로 익힌 자인가, 머리로 배운 자인가의 문제가 우선 자연시의 성립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인이 이 시를 쓴 목적은 ‘맞는다’ ‘보냈다’ ‘새웠다’ 등의 서술어―즉, 받아들이고 흘러 보내는 자연의 방식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지배적인 현실 세계의 리듬 외에 다른 리듬의 방식이 있음을 긍정한다. 더불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즐겨야 할 부분은 ‘오마주(Hommage)’로서의 형식에 있기도 하다. 딱 4줄의 행, 자로 잰 듯 맞춘 시행의 길이, 각 시행을 담당하는 단 하나의 문장, 그리고 ‘무엇은 ~한다’는 문장 형식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자. 당신이 이것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 무엇이 박용래 시인이라면 더 좋겠다. 네 개의 반복적 문장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시는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에서 완성되고, 최하림 시인의 〈저녁 바람은〉에서도 차용되었던 형식이다.
사실 충분히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을 이 시적 형식이 많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계승 정신과 실험 정신이 부족한 탓이다. 그리고 오늘 박용래의 작품과, 최하림의 작품과, 이은봉의 작품 세 편을 나란히 놓고 볼 때 느껴지는 것은 재미라기보다 쓸쓸함이다. 그 쓸쓸함은 잊혀 가는 탁월한 이름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2. 체험이 낳을 수 있는 것은 ‘물!’ 시단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역할은 소장 시인들의 몫이다. 특히 1990년대에 등단한 1970년대생 시인들은 왕성한 활동력과 작품의 수준에서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나이로는 40대지만, 시인 나이로는 한창 왕성한 10대의 시인들이다. 그리고 40대의 경험과 10대의 힘이 조화를 이룬 시인들은 복되고 아름답다. 이 중에서도 손택수 시인은 ‘젊은 자연시’의 분과를 이끌어 가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시즌에는 유독 ‘물’에 관한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목마름이 시의 물을 불렀던 것일까. 목마름 속에서 외치는 ‘물’에 관해서는 김남천의 소설 〈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때 그냥 ‘물’이 아니고 반드시 강조가 붙은 ‘물!’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두 평 칠 홉의 감방에서 일곱 달을 버티면서 느낀 갈증, 다시 말해 “전 몸뚱이를 가지고 그것을 느끼는”(김남천 〈물!〉)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택수의 시 〈물통·2〉에서의 물 역시 체험을 기반으로 발견되는 것이어서 간절한 ‘물!’의 유형에 속하고 있다.
손 시인은 자기 시의 기반으로 자연물의 하나하나를 챙겼던(〈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시인이다. 이 저작권 노출은 서정주의 고백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에 필적하되, 정반대의 지향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서정주가 자기 토양의 완전한 부정(否定) 속에서 출발한다면, 손택수는 토대를 긍정하면서 뿌리를 확장시키는 편이다. 이런 시인이라면 토대로서의 ‘물’은 관념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체험 안에서 퍼올린 것이어야 한다. 실제로 작품에는 경험이 만든 흔적이 완연하다.
“꽃에 물을 줘야 하는데 물통이 없다/ 접시꽃이라도 꺾어 퍼날라 볼까 하다가/ 두 손을 모아보기로 한다”는 구절을 보자. 처음에는 물통, 그랬다가 물통 대신 접시꽃, 다시 접시꽃 대신 손을 떠올리는 수순은 가문 날의 시인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나는 모처럼 물 한 방울 앞에서 공손해져서/ 연못 앞에서 자꾸 허리를 숙인다”는 구절은 어떤가. 시인은 “모처럼”이라는 단서를 남겼다. 그는 유년 시절 이렇게 손으로 물을 퍼내 마른 웅덩이에 물을 채웠을 터, 그래서 숱한 송사리와 올챙이를 구해 봤을 터, 이 점은 시인에게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경험이 “모처럼”을 통해 당신(꽃) 앞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겪은 체험으로서의 물이기에 그는 자연에 관한 한 전혀 식자답지 않은 어리숙함으로 몸을 웅크리거나 허리를 숙이게 된다.
여기서 탄생한 ‘사람 물통’은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목마름인가를 물었다. 손택수 시인이 기갈을 해결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 계절의 목마름은 인공 자연에게는 없는 것, 즉 타자에게 향하는 공손한 소통이 부재한 탓이다. 이를 테면 아이폰에 빼앗긴 시선이라든가 화려한 영상미에 지불한 공허한 마음에는 일방향의 수신과 기계적인 반응뿐이다. 혹자는 시대적 목마름에 대항마는 없다고, 네가 말하는 자연은 너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머리가 알고 있는 ‘물’이 아니라 몸이 겪었던 ‘물!’을 말하고 있고 이때의 느낌표는 믿음의 방향을 설득한다.
3. 얼음 인간의 목마름과 이주된 자연 손택수 시인의 자아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지니고 있고 이것은 나무의 표피처럼 시인을 감싸준다. 건강한 단단함이 시인의 장점인 내부적 온기를 보장하는 근거가 되어 주는 셈이다. 반대로 박연준 시인은 너무나 창백해서 그 창백이 계획적으로 양육된 현대 문명의 자식임을 드러낸다. 태생적으로 도시 시민이라는 점을 환경적으로 풀이하자면 뿌리 생물이면서도 뿌리가 퍼져나갈 토양을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은 한 사람을 얼음 요괴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인용된 작품의 세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은 들어갈 틈이 없다. 대신 시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콘크리트로 구성된 여러 개의 ‘방’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방’의 위상이 자연의 그것에 필적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의의가 우리를 양육하는 환경이라는 점에 있다면, 자연을 대신하는 자리에 ‘방’의 존재감은 사뭇 당당하다. 그리고 인공 환경이 자연 환경을 대체하면서 탄생시킨 자아는 현재 우리 시단에서 ‘반자연시(反自然詩)’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연준 시인의 작품은 목마름에 기여하는 ‘물’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 선보인 손택수 시인의 작품과 정확하게 반대꼴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빙하기〉를 읽으면서 왜 혹한의 계절이 목마름과 연결되어 있는지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비극적 상황으로 제시한 것은 한 사람이 전인간적인 통합체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작품은 그것을 각각의 방에 나누어진 자의식으로 구체화했다. 남자와 여자가 원래 한 몸이어서 서로를 원하게 되었다는 말처럼 원래 한 개체인 개인의 부분들은 완전한 일체(一體)를 원한다.
그리고 시인의 원망(願望)은 “쏟아지고” “흐르”고 싶다고 표현되는바, 물의 표상을 빌어 표현된다. 하지만 시인이 도달한 결론은 물에 대한 원망이 “결빙”되는 지점이다. 이때의 결빙이란 물이 있어도 흐를 수 없는 유폐의식과 박탈감을 상징하고 있다. 타고난 불행과 불구(不具)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 점이야말로 자아를 시들게 하고 목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는 이 강박관념이 시인 홀로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계절의 목마름은 혼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청년 및 청년 시인들과 함께 불행하다. 그리고 이들의 표정에는 자연의 일부로 태어났으나 자연을 지식으로만 접해야 했던 안드로이드적 자화상이 드리워져 있다.
김중일의 작품 또한 ‘결빙’의 편에 서 있는, 불구(不具)의 감각으로 소개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인용한 이유는 ‘나무’의 특이한 위치 때문이었다. 인용시에서 시인은 “내 몸속에서 평생에 걸쳐 자라는 나무여”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나무는 대지에서 자랄 수 없어서 몸속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인데, 여기 ‘이주된 자연’이야말로 방(인공 자연)에 의해 사육된 자가 꿈꾸는 자연의 방식을 보여준다. 상이한 존재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자연이 전면적으로 시의 원천이 된다는 점은 시와 자연의 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시가 내재적인 자연의 기여를 통해 창작된다면, 젊은 시인들의 ‘다른 자연’은 이렇듯 자연의 기형적인 생존 방식을 통해 탐구될 것이다. 기형은 입장에 따라 불구로 볼 수 도 있지만 분명 진화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反)자연시’ 내지는 ‘반(半)자연시’를 포함하여 자연시의 외연을 확장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중일 시인은 분명 “내 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무”에 대한 인식과 감각 때문에 시를 썼을 것이고, 이러한 불편함은 더 젊어지는 시인들 사이에서 궁구될만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주된 자연의 기형적 생장점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4. 결빙을 승화시키는 힘 단연코 이 계절은 목마름의 차지였다. 반동적으로 어느 때보다 시인들은 ‘눈물’이라든가 ‘물’ 또는 ‘강’과 생명 등에 눈길을 돌렸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한 시즌의 작품을 모아 놓고 읽다 보면 가끔 시인과 시인 사이의 약속되지 않은 교류를 보게 된다. 다른 말로, 한 유명한 시인이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공통된 열망이 시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우리 시단의 힘이다. 그러니 이번 시즌을 물에 대한 소망들로 풀이하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어떤 시인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를 소망하게 하고, 어떤 시인의 작품은 다시금 절망하게 한다. 그 진자 사이에서 절망과 희망을 함께 다루는 박형준 시인의 작품은 가장 마지막에 배치할 만하다. 이 작품은 우리의 목마름과 결빙에 대해 낮은 곳의 깨달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가장 좋은 구절은 “아, 서리에서 김이”라는 부분이었다. 시인은 ‘아’라는 감탄사를 먼저 붙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 역시 ‘아’라고 감탄하면서 공감했다. 시인이 본 것을 따라가 보자. 어느 마당에 한 어미 개가 있어 가장 연약한 생명을 낳았다. 이것이 축복일까 비극일까. 내재적 자연을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또는 기형된 인공 자연에 사는 우리로서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우리의 미정(未定)에 대해 박형준 시인 역시 결론은 이르며 남겨져 있는 것은 주어진 생명을 살아가는 소박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용시편에는 그 근거로서 물에 대한 제3의 방식이 존재한다. ‘서리’는 얼어붙어 결빙된 물, 그리고 ‘김’은 기화되어 나타난 가장 가벼운 물이다. 그런데 서리가 물이 되고 물이 김이 되지 않고 한 단계 건너뛰어 막바로 서리가 김이 되기도 한다. 물질 변환 법칙을 떠나 적어도 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결빙을 승화시키는 어미 개의 순간을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고 본능이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 분명한 것은 이 장면이 어느 시인과도 멀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분열된 자의식을 노래하는 젊은 시인들도, 세상을 묵시록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편들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니까 불행해 하고 분노도 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언젠가 기화되는 서리가 진신사리처럼 등장할 것이라고 모든 시는 믿고 있다. | ||||||||||||||||||||||||||||||
- 유심(http://www.yousim.co.k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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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