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6

문근영 2014. 4. 17. 19:13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6
 
나민애
□ 봄은 찬란합니다, 그러나
 
- 이은봉, 「쉰」, 시집 『첫눈 아침』, 푸른사상, 2010. 12.
 
더는 뜻 세우지 못하리 더는 어리석어지지 못하리 더는 천박해지지 못하리 더는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
 
더는 술 취해 길바닥에 나뒹굴지 못 하리 더는 비 맞은 초상집 강아지 노릇 못하리
 
가을이 오면 호박잎 죄 마르는 거지 늙어빠진 알몸 절로 불거지는 거지 담장 위 누런 호박덩어리 따위 되는 거지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 유유히 세상 내려다보는 거지 가난한 마음 더욱 가난해지는 거지.
 
* 현대판 세시풍속에 따르자면, 3월은 입학식의 달입니다. 입학하는 자에게는 자신들도 모르는 찬란한 빛이 있습니다. 이 찬란함은 당사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 입학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입니다. 그리고 그 광채는 눈이 부실 정도여서 3월을 더 황홀하게, 때로는 참혹하게도 만듭니다.

  3월에는 많은 신입생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이 있습니다. 마치 목련꽃처럼 팍, 하고 피어나는 젊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부분의 일이고 소수에게 해당되는 복된 날입니다. 이면에는 더 많은 졸업생들의 어두워가는 나이 헤아림이 있습니다. 이은봉 시인의 시 「쉰」은 바로 그런 다수의 사정을 함축합니다.
 
늙음의 적나라한 ‘알몸’을 미화하지 않고 보여 주는 시를 읽으면서 당신은 ‘맞다, 맞아’하며 무릎을 치고 계신가요? 어리석음을 방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사랑에 빠지는 일이 남일 같이 느껴지나요? 이제 더 이상 뜻을 세우는 일이 매우 벅찬 일이 되어 가고 있나요? 대답이 ‘아니오’라면 당신은 아직 재학 중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이 시를 읽지 않기를, 모른 척 젊음을 더 즐기다 오기를 바랍니다.
 
 
□ 시인의 받아쓰기
 
- 윤제림, 「하구(河口)의 일몰」, 《문학사상》 2011.3.
 
집으로 가는데,
 
큰물에 떠 내려왔다가
판문점 넘어가는 북쪽의 사람들처럼,
이쪽의 옷은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만세를 외치며
냅다 뛰어 달아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데,
 
돌 지난 아이 남겨두고 추방되는
베트남 여자처럼,
상한 몸만 겨우
올 때 입었던 그 옷으로
싸고 또 싸고.
 
*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시론을 읽었습니다. 많은 경우 시론에는 어렵고 추상적인 명사가 대거 동원되지요. 그렇지만 윤제림 시인의 시론은 쉽고, 재미있고, 유쾌했지요. 그는 자신의 시를 ‘받아쓰기’라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옳게 받아쓰고, 어느 때는 영 엉뚱하게 받아쓰기도 한다지요. 그런데 내심 윤제림 시인은 오답이 될만한 받아쓰기를 더 사랑하는 듯 했습니다. 청산유수처럼 맛깔나게 말을 잘 굴려서, 맛있는 말의 일등석을 생각한다면 소설에는 성석제요 시단에는 윤제림 시인인데, 이런 시인이 오답을 애호한다니 아이러니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천편일륜적인 죽은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포착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만약 그에게 같은 문제를 100번 맡긴다면, 100번 모두 다른 답안을 내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시와 삶은 추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의 인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마치, 이 시에서 ‘하구의 일몰’과 같은 자연 현상을 ‘북의 사람들’과 ‘베트남 엄마’와 같은 인칭으로 치환시켜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 우리 아이가 아파요
 
- 오봉옥, 「월식」, 《현대시》 2011년 3월.
 
사람들은 왜 달을 보면 소원을 비는 걸까. 달나라에 사는 서기가 눈이 침침해 구름만 좀 끼어도 보지 못 하는 걸. 서기가 된 늙은 토끼가 가는 귀까지 먹어 아무리 중얼거려도 받아 적지 못 하는 걸.
 
그보다도 토끼 눈에 아른거리는 한 아이의 머루알 같이 까만 눈망울뿐인 걸. 파리 떼가 다닥다닥 달라붙어도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다섯 살짜리 검은 소녀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아무래도 사그라들지 않는 걸.
 
가슴 아픈 달이 구만리 장천을 홀홀이 날아가 구석구석 부서지는 이유를, 파리한 아이들이 그 달빛 부스러기를 끌어안고 새우처럼 웅크리며 자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는가.
 
사람들은 아직도 토끼가 방아나 찧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서기가 된 토끼는 벌써 다음 生을 준비하고 있는 걸. 늘 천자 만자 받아 적기만 하는 게 안타까워 햇덩어리로 깡총 몸을 던져 빛알갱이로라도 다시 태어나고 싶은 걸.
 
오늘은 해도 그 마음 알아채고 달그림자로 사르륵 스며드는 걸.
 
*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퓰리처상 사진은 1994년 케빈 카터의 사진입니다. 당신은 쉽게 이 사진을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내전과 기아가 계속되던 수단에서 작고 깡마른 아이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아이는 식량배급소에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는 독수리가 있습니다. 사진을 접한 사람들은 그 독수리가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아이는 당장 죽지 않았지만, 그 아이의 앙상한 뼈마디에 죽음의 기운이 짙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 기아는 끝나지 않을까요. 왜 죄없는 아이들이 배고프고 아파야 할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프고 아픈 아이들은 아직도 여전히 있습니다. 멀리 수단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이웃집에도 있습니다. 시인은 배고프고 착한 아이들을 위해 이 시를 썼습니다. 하늘의 달을 끌어다가, ‘파리한 아이들이 그 달빛 부스러기를 끌어안고 새우처럼 웅크리며 자는 이유’에 비추었습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아픈 아이들의 영상이 떠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항아와 노닐던 달토끼를 데려다가 ‘파리 떼가 다닥다닥 달라붙어도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다섯 살짜리 검은 소녀의 눈망울’을 보듬게 했습니다. 머리의 모든 지식과 상상이 약한 아이의 아픔에 바쳐져도 억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아이가 아픕니다. 우리 아이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달은 더 이상 신화의 에덴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토끼는 차마 신화의 조각품으로 고정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시가 케빈 카터의 사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얄팍한 시선과 지식과 상상을 바쳐서 한 아이의 하루 배고픔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유를 알면서도 죽음을 방기한 우리의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 나는 나를 잃으면서 삽니다
 
- 한미영, 「나는 가고 나만」, 《시산맥》 2011년 봄호.
 
럭셔리한 호텔 커피숍
젊고 세련된 남자 바리스타
흰 와이셔츠에 단정하게 앞치마 두르고
루왁커피 한 잔 내어민다
사향고양이 뱃속에서 익힌 커피 알맹이
그 배설물로 만든다는 똥커피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
봉지담배를 쟁여 곰방대 피우실라치면
팔각성냥통에서 얼른 성냥개비 꺼내
불 그어 대는 나를 보고
똥도 버릴 게 없는 내 강아지
똥도 버릴 게 없는 내 강아지
우쭐해진 나는 부상으로 받은 성냥 한 통 끌어안고
성냥개비 끝에 발린
커피 향처럼 후각을 쏘던 빨간 유황을
싫증나도록 빨아먹었다
허연 막대기만 남은 성냥개비를
배설물처럼 깔고 앉아서 이담에 당연히
똥도 버릴 게 없는 어른이 될 거라 믿었다
이제
맛도 모르고도 맛있게 유황 먹던 그때처럼
지나치게 숭고한 루왁커피 한 잔 마시며
똥도 버릴 게 없다던 나는 어디
남의 똥을 마시고 앉은
세련된 나만 남았다
 
* Letter No. 1 - To me.
  이 시를 읽고서 작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당신, 또는 적어도 당신의 70% 이상 역시 같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도 아시지요. 다분히 애처로웠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뭐가? 하고 묻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마치 헨델과 그레텔이 작은 빵조각을 점점이 떨어뜨리면서 영영 길을 잃어버리듯이 (동화처럼 그들이 정말 집으로 돌아왔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젠 없으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조각을 점점이 잃어버리면서 우리를 배신합니다. 내가,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갑니다. 다행히도 잊고 지냈던 이 사실을 시인은 공연히 꺼내 다시금 확인해주는군요. 그것을 슬프고 용감하게 말하는군요. 이 시에서 즐겨 팔각성냥의 유황을 빨던, 그래서 위대할 뻔 했던 한 어린 영혼을 보세요. 그 당당함은 필시 하루하루 자신을 지킬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생략. 과거 한 위대함의 가능성은 오늘날 남의 똥을 우아하게 먹는 타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나는 가고 나만’ 남았다는 말로서 비극적 상황을 규정합니다. 아아, 우리는 ‘당신만 가고 나만’ 남아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보다 더한 비극이 ‘나만 가고 나만’ 남아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이 시는 ‘자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날마다 이별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과 이별하며, 그 이별을 대가로 치르면서 삽니다. 아마 우리의 태반은 그 아픈 이별을 잊기 위해 타인과의 이별에 일부러 많은 눈물을 할애하며 발버둥치는 지도 모릅니다.
 
나민애  편집위원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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