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강은교 시인론 : 타자의 소리를 듣는 시 / 신진숙

문근영 2014. 4. 7. 16:43

강은교 시인론 : 타자의 소리를 듣는 시 / 신진숙
―강은교 시인론
[49호] 2011년 03월 10일 (목) 신진숙 문학평론가

존재하는 것에 그림자 없는 것이 없듯,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말소리를 지닌다. 나뭇잎은 나무의 언어이며, 구름은 하늘의 언어이다. 바람 역시 허공이 건네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그 많은 언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한 ‘존재자’ 즉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몸을 지닌 존재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차이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교감 그 자체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만물은 조응할 수 있는 누군가의 귀를 얻을 때 비로소 언어가 된다. 하나의 언어는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살아 있는 하나의 소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귀는 우리의 발달한 눈만큼이나 맹목적이다. 보이는 것만을 보려 하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을 들으려 한다. 그것은 문명이 인간의 언어만을 맹신하면서부터이다. 맹목은 야생의 문자들을 모두 추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문자에 대한 믿음이 역설적으로 더 많은 두려움을 배태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연의 언어에 대한 해독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를 존재하게 한 우주적 바탕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교감은 어렵고, 언어는 점점 더 위협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그것은 나뭇잎의 광합성을 알아도, 그 푸름의 ‘뿌리’가 사랑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나는 여기 단순히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하나의 주체는 타자들의 소망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타자의 사랑이 없다면, 그리고 타자를 향한 서로 간의 어루만짐이 없다면, 나는 있을 뿐 정말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타자는 모든 주체의 뿌리이자 기원이다. 이것이 우리가 나 아닌 것의 소리에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하는 가장 단순한 이유이다.

 

다행히 시인은 일찍이 이 좁고 좁은 언어의 통로들을 뚫을 수 있었던, 이 세계의 몇 되지 않는 소리꾼 중 하나이다. 그들의 작업은 우직하다. 그들은 그들이 듣고자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듣는다. 의미는 소리에 대한 경청, 그다음이다. 경청에 관한 한,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섣부름이야말로 우주와의 교감을 차단한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소리와 소리의 연관, 그 흐름의 상호작용을 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유능한 소리꾼은 그러므로, 소리를 창조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득음’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시가 하나의 귀가 되고 입술이 될 때, 살아 있는 육체가 될 때, 시인은 비로소 다른 모든 언어들과 함께, 진정으로 살아 있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시는 접신과 비슷하다. 그것은 마치 주술과도 같다. 그러나 시는 주술도 접신의 언어도 아니다. 시는 하나의 언어와 다른 언어들 사이의 교신일 뿐이다. 어떤 강력한 존재에 대한 귀의나 절대적인 신앙도 지니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소리를 찾고 또 발음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인은 영험한 주술사가 아닌 평범한 소리꾼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강은교 시인 역시 이 소리꾼들 중 하나이다. 

 

‘존재’로부터 ‘존재자’에로

강은교 시에 대한 수많은 글은 그녀의 시가 허무 의식을 생의 의지로 바꾸어 가는, 조금은 격렬하기까지 한 시적 변화 과정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그녀의 시를 읽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강은교 시인에게 허무는 실존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녀가 앞으로 행하게 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 배면이다. 이는 그녀의 초기 시집 《허무집》(1971)이 지닌 역설이다. 죽음에 대한 밀도 높은 상상은 그 자체로 생에 대한 새로운 의지로 전환되며, 삶이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이를 통해 시인은 허무의 밀폐적인 나르시시즘을 극복한다. 이는 《빈자일기》(1977) 이후, 그녀의 시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시는 개인적이고 심미적 공간을 벗어나, 사회적 삶으로 확장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극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허무를 설명하는 방식은 비교적 단조롭다. 허무의 뿌리는 충분히 설명되기 전에 이미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심미적 집중은 윤리 앞에서 적극적일 수 없다. 그러나 허무의 의미는 좀 더 세밀하게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허무는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 스며든 것이 아닌가. 무릇 산 것 중에 허공 아닌 것이 있었던가. 삶의 손가락은 매 순간 부재의 방향을 가리킨다. 허무란 죽음이면서 동시에 이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한 하나의 마음 비움이 아닌가. 따라서 허무는 처음부터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寢牀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生死의
저 캄캄한 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自轉〉(《허무집》) 전문

 

 시인은 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허공에 도착한다.”(〈여행차(旅行次)〉 《허무집》)라고. 모든 존재의 마지막은 허공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부재의 공간이다. 부재는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그럴 때 시인은 ‘존재’를 발견한다. 생멸을 반복하고, 있음 가운데 없음을 무한히 부여하는 본질적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즉, 지금 나의 몸, 이 현존하는 몸은 무한한 존재의 흐름 중 일시적인 구현이며, 존재 자체는 영원히 깨달아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허무란 이처럼 비본래적인 삶의 내부로부터 본래적인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다. 현존재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깨달아가는 하나의 과정인 셈이다.

초기 강은교 시에서 나타나는 허무가 이러한 존재론적 시차 속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 날이 저물고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지는 순간, 시인이 느낀 허무는 “무한천공(無限天空)”을 가르는 존재의 무한성과 유한한 현존의 틈에서 발생한다. 존재의 유한함은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의 영원성과 대조를 이룬다. 허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생의 미망일 것이다. “생사(生死)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존재의 영원한 시선 앞에서 “자기의 살을 감출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강은교 시인의 허무가 지닌 역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하리라. 즉, 존재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허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깨달음.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이란 바로 이 허무의 변주이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모호하다. 풍경은 관념적이며, 존재가 존재자를 압도함으로써 몽환적인 순간에 접하게 되는 어떤 낯선 리얼리티의 환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때로 관념은 그 어떤 미메시스보다 강력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문제는 허무의 심연이다. 깨달음을 출발시키지만, 여전히 실천 이전이며,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생의 수축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허무가 하나의 진리를 찾아가는 공정 과정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 자체의 현현이 아닌 살아 있는 지금 여기의 몸, ‘존재자’에로 관점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는 허무가 하나의 구체적인 윤리 속으로 스며드는 하나의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빨래 너는 여자〉(《어느 별에서의 하루》) 전문

 

허무의 바탕인 허공은 이제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한천공이 아니라 존재자들의 숨결 속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혹은 가깝게도 멀게도 존재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과도 같다. 깊이와 넓이를 지니게 된다. 거대한 그러므로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의 무한한 흐름 앞에서 시작된 허무는 이제 한 존재자의 몸속으로 이동한다. 삶이 “허공”과 함께 밥을 먹고, 숨을 쉬고, 또 일을 한다. 가령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는 풍경과도 같이. 모든 시간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시간은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드는 순간, 허공은 이제 ‘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것이 된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빨래를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거는 “그 여자”의 모든 행위 속에 허공은 삶의 배후가 아니라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어제/ 허공 하나를 얻어왔네/ 벽에 걸었네/ 밤새도록 닦았네// 별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나왔네”(〈허공 하나를〉 《어느 별에서의 하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허공과 존재자의 공존의 화음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허무는 극복되거나 사라질 것이 아니라 보다 명료해지는 어떤 것이다. 즉, 허공이 없다면 삶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역시 가능하지 않다. 허공은 존재의 거대한 무덤이 아닌 삶의 본래적 모습이다. 시인이 자기 자신 이외의 타자의 삶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 역시 이 허공/허무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허무 앞에서 평등하다. 허무가 없다면, 세계에 대한 저항도, 타자에 대한 연민도 없다. 시와 함께 허무는 더 깊어져 간다.

 

모든 것의 그림자, 모든 것의 사랑

‘그림자’에 대한 시인의 집요한 탐색을 이러한 시적 허무와 과연 분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한 허무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는 시적 역설은 가능한가.

 

기실 그림자란,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다. 그것은 어둠이면서 동시에 어둠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존재 자체는 아닌 것. 하나의 몸이 다른 하나의 몸에 닿았을 때에만 비로소 드러나는 것. 아무런 의미도 없으면서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알리바이. 나아가 강은교 시인에게 그림자는 사물이 사물 속에 스미는 현상이자, 모든 것에 주어지는 완전한 공평무사 그 자체이다.

 

풀에도 그림자가 있다
모래에도 그림자가 있다
작디작은 저 잎새에도
저렇게 작은 것에 그림자가 있을 줄이야
저 파도에도!

 

땅속으로 그림자가 스며들어간다
그림자의 비늘이 스며들어간다


땅속으로 나의 뼈도 스며들어간다
땅속으로 나의 뼈의 비늘이 스며들어간다

땅속에서 그림자가 일어선다.
나도 일어선다.
나의 살도 일어선다.
나의 살의 비늘들도 일어선다.

 

모른 체 떨어지는 갈대 씨앗 하나.
―〈그림자에게 부치는 노래〉(《등불 하나 걸어오네》) 전문

 

“모든 구름에” “뿌리”가 있듯  (〈구름의 뿌리〉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다. 모든 존재는 “모두 자기의 베개와 그림자를 들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지금쯤〉, 같은 시집) 강은교 시인에게 그림자는 존재와 존재의 부재 모두를 증명한다. 그것은 존재 내부에 존재하는 허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존재함 자체의 고통을 상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실존적 뿌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풀에도 그림자가 있”고, “모래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제 존재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더욱더 옳다. 따라서 시인은 그림자를 부정하기보다 긍정한다. 허공을 삶의 바탕으로 이해하였듯, 그림자는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이다. 그녀에게 그림자는 나라는 존재의 “살”이자, “살의 비늘”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림자가 어떤 중요한 ‘윤리적 관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림자는 외부의 이물질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스밈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그림자와 그림자”를 “붙안고”(〈나방 한 마리―향가풍으로〉, 같은 시집) 살아간다. 그림자가 있기에 “산 것들은 서로 울음으로 화답”할 수 있다(〈얼른 그림자 위에―향가풍으로〉, 같은 시집). 그림자라는 실존의 무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러므로 아픔이나 고통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한 존재자, 한 생명일 수 없다. 그림자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타자를 껴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추론도 가능하다. 타자는 존재를 구원한다. 즉, 죽은 부모를 구원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비리데기’처럼, 주체는 언제나 이미 타자를 통해 구원받는다. ‘나’이면서 나 아닌 그림자를 통해 타자의 가능성을 이해하며, ‘타자’를 통해 비로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강은교 시인에게 그림자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사유의 첫 출발점이다. 이제 시인은 어떤 추락 속에서도 “너를 찾아간다”(〈너를 찾아〉 《어느 별에서의 하루》). 그리고 마침내 어둠이 사랑의 바탕이며, 절망이 희망의 전조라는 사실에 도달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말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의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리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초록 거미의 사랑》) 전문

 

강은교 시인에게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것은 ‘타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즉, 주체로서의 삶은 타자라는 존재의 가능성에서 시작한다. 만일 모든 삶이 나만을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기에의 연루’를 벗어날 수 없다. 거기에는 타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란 타자라는 이질성과 함께 출발한다. 나와 동일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성을 통해 나의 불가능성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나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는 단지 거기 있을 뿐인 ‘존재’의 삶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존재를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사랑 역시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정립 속에서만 가능하다. 기실 타자는 내가 아니며 그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 같이 다른 존재를 향한다. 즉, 하나의 존재가 자신의 몸을 벗어나 타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에로스가 모든 윤리의 원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랑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인 존재자의 삶은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빗방울 하나가 5〉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타자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삶 그 자체, 즉 그저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만을 위하여 노동하는 부질없는 삶으로부터 우리는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관계이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론적 삶에 대한 깨달음.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강은교 시인은, 이러한 관계론적 사유 속에서 ‘같음’과 ‘다름’을 하나의 흐름 속으로 끌어당긴다. 즉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므로 “밤 하늘에 긴 금”이 가는 것은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별똥별―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네 번째 노랫소리〉 《초록 거미의 사랑》).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 순간 “나의 집이/ 휘청”하는 것 역시 너 때문이다(〈빗방울 하나가 1〉 《등불 하나 걸어오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한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빗방울 셋이〉 《초록 거미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겠는지.


이제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주체와 타자 사이의 수많은 인연이 그녀의 시를 사물에 대한 관조를 넘어 흐드러진 소리의 굿판으로 이끌어간다.

 

관조로부터 소리의 굿판으로

그렇다면, 허무 속에서 타자를 향하는 사랑의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시인마다 같을 수 없다. 시인들은 고유한 시적 방법 속에서 타자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 강은교 시인의 경우 그것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으며, 시인은 이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타자에게로 기운다. 그들의 소리가 시인을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든다. 이 때문에 강은교 시인의 서정은 다른 여느 시인들과 달리 목소리에 의한 공명이 강하다. 이는 그녀의 시에서 시적 주체의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그녀가 언어의 ‘귀’를 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타자의 소리는 혼돈에 가득 차 있다. 마치 유령의 그것처럼 목소리는 들을 수 없거나, 잘 해석되지 않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왜, ‘자전’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택했던 삶에 대한 관조를 버리고 타자의 목소리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 그 목소리를 발음할 수 있는 입술이 되기를 그토록 강렬하게 꿈꾸었는지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리로 오시오 넋들이시여
산그림자들 저희끼리 쓰다듬고 있는 저 산맥을 지나서
한 물결이 두 물결에 안겨 있는 저 모래밭을 지나서

 

물의 옷을 지나서
바람의 싸움을 지나서

 

시끄러운 길들은 조용하게 하시오
풀썩풀썩 얽힌 그림자 길들 풀어지게 하시오

 

아, 이렇게 많은 당신
그림자 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는


당신의 밭

당신 목소리 어디에선가 들려
돌아보니 아직 잠 못 깬
안개의 잿빛 손가락
허공을 가리키는구나

 

이곳은 갈수록 메마른 곳
여름 바람 자꾸 일어서는 곳
돌아보니 허연 달
푸른 저녁에 긴 입술 문지르고 있는데

 

이리로 오시오 넋들이시여
이리로 오시오 넋들이시여

 

두 어둠이 한 어둠에 안겨 있는 산맥을 지나서
두 물결이 한 물결에 안겨 있는 모래밭을 지나서

 

당신 목소리에 얽힌 저 길들 풀어지게 하시오
넋들이시여, 넋들이시여
그리하여

 

허공 휘휘 젓는 기쁨
휘휘 달리는 기쁨
예서 만나시기를
아, 만나시기를


―〈헌화가―둘째 소리〉(《초록 거미의 사랑》) 전문

 

이 시에서 보듯, 시인은 타자의 목울대가 되기를 원한다. 시의 완성은 바로 이 타자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가 이 시를 “소리굿”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목소리의 주인, 즉 시적 주체인 나의 몸속에는 언제나 이 타자들의 목소리로 들끓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물길의 소리〉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그것은 자연이 내는 소리이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언어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알지 못했던 한 존재자의 고통과 슬픔, 희망과 분노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하여 시인은 관조적 삶의 성찰로부터 시적 굿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발화자는 타자의 아픔을 위무한다. 리듬과 자구의 자연스러운 반복은 형식을 가볍게 하는 동시에 목소리에 힘을 더해 주는 효과를 지닌다. 후기로 갈수록 그녀의 시가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 그것도 전통적인 서정 속에 등장하는 원형적 자연 상징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다 이와 관련된다. 이럴 때, 시는 고차원적이고 고양된 은유나 상징 자체를 무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까지 말할 수 없었던 타자의 말이 ‘풀어지고’ 치유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점에서 강은교 시인에게 시는 문자이기에 앞서 소리이며, 언어이기에 앞서 혼령들의 목소리이다. 혼의 소리를 발화하는 것, 그것이 시인의 내부에 살고 있는 “아, 이렇게 많은 당신”들을 읽는 방법이자 그들의 상처받은 혼을 달래는 형식이다. 넋들이 가리키는 “허공”이 단순히 텅 빈 공백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고통과 사랑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처럼 타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동안, 시인 역시 치유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통과 허무 앞에서 시인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녀 내부에서 떠나지 않는 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타자의 목소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은교 시인의 자리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녀는 고통의 소멸이 아닌 고통 이후의 삶을 말한다. 즉,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흐름의 허무 속에서 삶을 이해하는 ‘사랑법(法)’을 터득하고자 한다. 그녀의 최근 시, 〈희명〉이 서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희명아,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너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감은 눈을 위해
나는 보지 않기 위해
산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워어이 워어이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붙이고
희명아 저 노을 앞에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
종잇장 같아지는 흰 별들이 떴다
우리의 기도문을 실어갈 바람도 부는구나
세월의 눈썹처럼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희명아, 오늘 밤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붙이자
워어이 워어이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희명〉(《세계의 문학》 2010 겨울) 전문

 

즉, 시적 주체는 ‘희명’과 함께 죽음을 되돌릴 것을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떠나보내기 위해 기도한다. 역설적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할 것이다. 슬픔을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워어이 워어이” 굿으로 떠나보내고, 비워냄으로써 부재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치유란 고통에 대한 이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바로 그 점이 죽은 아들을 되살리기를 원했던 희명과 시인의 차이이다. 그것은 시라는 언어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희명이 소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시는 “보지 않기 위해/ 산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쓰인다. 그리고 고통의 비움 속에서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 치유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강은교 시인은 말한다. “시는 결코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결코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나무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뿌리 깊은 것이다./ 시는 나무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잎들 세상에 출렁이는 것이다.”(〈어떤 회의장에서〉 《초록 거미의 사랑》)라고. 그녀의 시는 허무가 잘 익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자기를 비움으로써 사랑이 시작될 여지가 생기듯, 점점 더 많은 것을 덜어내고 지워가는 중이다. 시굿처럼 리듬으로 만들어지는 무수한 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가 하면, 몇 개의 단어, 몇 개의 문장만으로 사물의 숨겨진 ‘은빛’ 소리를 들려주기를 꿈꾼다. 그것은 현대 세계의 복잡함을 잠시나마 잊고, 나만을 위해 투입된 에너지들을 타자와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것이 강은교 시인이 시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또 타자와 공명하며, 자신의 고통을 승화하는 시적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언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더구나 우리 삶을 녹여줄 어떤 자연물도 우리 사는 곳에서 현실적으로 찾아낼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어떤 세대보다 자연으로부터 멀다. 그래서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공명하고 싶지만 점점 더 고독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자연의 일부로서보다 문명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 더 쉽다. 강은교 이후의 서정이 지닌 또 하나의 짐이 아닐까. 모든 시에 대한 고민이 다시 출발한다. 


 

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학술연구교수.

 

 

-http://www.yousim.co.kr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