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축제는 매년 두 곳에서 열린다. 다산 선생이 태어나고 천수를 다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유적지에서 열리는 <다산문화제>(2011.9.30~10.2)와 다산 선생의 유배지이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초당(茶山草堂)등 다산의 유배지 흔적이 남아 있는 전남 강진 지역의 <다산제>(2011.10.14~15)이다.
다산을 기리는 문화제는 두 곳에서 각각 열리지만 선생이 후대에 남긴 학문과 문화유산의 흔적은 어느 특정 지역의 산물만은 아닐 터. 올 가을엔 남양주시 조안면과 전남 강진의 다산 선생 유적지를 모두 답사해 보았다. 개인적으론 인생 최고 절정기에서 타의로 유배를 떠난 선생이 자신의 불행을 딛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강진의 다산초당이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다산 유적지로 손꼽는다.
특히 다산초당은 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굴곡진 생애 가운데 맞닿을 수도 있는 불행이나 낙마를 어떤 자세로 대하고 이를 극복해 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롤 모델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을 때면 항상 뭔지 모를 마음의 힘을 얻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올 가을 답사 때도 이런 기분은 여전했다.
다산초당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남도 땅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엔 외가(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 초당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책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목민심서 牧民心書>, <경세유표 經世遺表>, <흠흠신서 欽欽新書> 등 약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다산초당은 원래 윤단(尹?)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다산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다산이 거주할 당시에는 초막이었으나 복원 당시엔 정씨 문중에서 선조의 집에 기와를 얹어야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해서 1957년 다산유적보전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세우면서 초당(草堂)이 아닌 실제론 와당(瓦堂)이 되었다. 향후엔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입구에서 좌측으로 서암, 중앙은 다산초당
다산초당 옆 서암(西庵)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 마을 끝단에서 다산초당 표지판이 있는 숲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가파른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 언덕 위에 다산초당이 있고 그 왼편으로 서 있는 건물이 서암이다.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
다산초당과 동암 사이에 있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돌탑이다. 다산은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강진만 바닷가 돌을 주워와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이라 하였다. 이 연못에선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한다. 또 다산은 연못 속 잉어의 상태를 보며 그날그날 날씨 상태를 알아내었다고 하니 그 관찰력과 지혜가 대단하기만 하다.
연못과 중앙에 돌로 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산초당 뒷편엔 작은 샘이 하나 있다. 약천(藥川)이다. 이 약천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있던 곳이었는데 다산이 직접 이곳을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지금도 맑은 물이 조금씩 흘러내린다.
약천(藥川)
약천이 바로 보이는 다산초당 앞 마당엔 큼지막한 넙적바위가 앉아 있다. 이곳은 '다조'(茶?)로 쓰이던 돌이다.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가 주변에서 모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생 차를 좋아했던 다산 선생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특별한 장소이다.
다조(茶?, 차 부엌?)로 쓰인 돌
동암에서 오른편으로 난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다 보면 작은 정자가 하나 나온다. 천일각(天一閣)이다. 이 천일각은 다산 선생이 동쪽 산마루에 올라가 바람을 쐬거나 흑산도로 귀양을 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는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다산 선생이 있던 당시엔 없었던 건물이다. 이곳에선 강진만 풍경이 가까이 내려다 보인다.
천일각(天一閣). 다산 선생 당시엔 없었던 정자
천일각에서 내려다본 강진만과 도암면 만덕리 일대 논 풍경
귤동 마을 인근에 조성된 다산 정약용 선생 기념관. 다산 선생이 남긴 어록이 돌에 새겨져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 기념관 뒷편은 다산초당이 들어서 있는 만덕산 능선
다산초당은 강진읍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 뒤 만덕산 기슭에 있다. 정약용 선생의 호인 다산(茶山)은 원래 차나무가 많았던 이곳 만덕산의 별명이었다고 한다. 강진읍내에서 버스로 20분 정도면 족히 가는 거리에 있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선 강진만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진 마을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백련사 입구를 지나 귤동 마을 입구에서 정차한다.
다산초당은 이 귤동 마을 입구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통해 접근하거나 인근 다산기념관을 둘러본 후 마을 뒷편으로 돌아 들어갈 수도 있다. 아니면 백련사 입구에서 내려 백련사를 둘러본 후 다산초당으로 이어진 만덕산 생태숲길을 따라 이동할 수도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지 옛 다산 선생의 자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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