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에서 부르는 부활의 노래
-김명인 시집『東豆川』서평
-이달균(시인)
지난 날 나는 김소월의 '초혼'을 읽으면서 불멸이란 단어를 생각하곤 했다. 한 천년을 마감하는 해인 오늘. 새 천년이란 시간 개념을 통해 보면 시인 김소월은 불과 육십 년 전의 세상을 살았던 우리 시대의 시인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미 그는 고전이 되었고, 요절한 민족시인이란 수식어로 장식된 신화가 되어 있다.
신화는 지난 시대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결국 김소월은 우리 시대의 가인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불멸의 시인은 있을 것인가. 탄생이 곧 소멸인 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 불멸의 것들은 존재하는가. 아니. 영혼의 영원성을 경배하고 추억해 줄 시대의 사람들은 있는 것인가. 어쩌면 시인은 잊혀 질 것이다. 섣부른 결론에 이르고 싶진 않지만. 불멸의 영혼을 갖지 못한 시인들은 인명사전 속에 이름 석자를 누이고 조용히 잊혀 져 갈 것이다. 한때 그의 시를 사랑했던 일군의 독자들도 신제품처럼 밀려오는 신문화에 탐닉하면서 서서히 시인을 잊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먼저 그가 펴낸 시집들은 이미 낡아서 헌책방 한구석을 뒹굴다가 마침내 폐휴지로 실려 나갈 것이다. 시인이란 이름 석자와 몇 줄의 시는 그래도 몇 사람의 기억 속에 추억처럼 남아있겠지만 시집은 그렇게 실려 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명인의 시집 『東豆川』을 읽는다. 79년 10월 25일 초판 발행된 <문학과 지성> 시선집이다. '다시 읽는 추억의 시집'이란 코너에 내가 굳이 이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독자들께서는 이 시집이 출판된 79년이란 해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70년대는 '청년‘이란 이름의 한 세대가 비로소 대중문화라는 말을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가 온 나라를 위압적으로 통치할 때, 청년들은 청바지, 통기타, 장발 등의 동질의 표현으로 서서히 저항의 여론을 형성하면서 잠재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대수, 김민기, 송창식 같은 대중음악의 기수들은 노래를 통해 청년문화를 한 궤로 엮어 내었고. 영화감독 하길종은 「바보들의 행진」이란 영화를 통해 ‘바보’ 라는 한 단어로 시대를 조롱하면서 저항의 폭발력을 시험하던 시기였다.
한편, 시인들은 60년대의 난해한 모더니즘 시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고, 하고픈 말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시들에 반(反)한다는 도전적 언어인 <反詩>라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 시절 제어하지 못할 열정으로 문학청년기를 보내던 우리들에게 <反詩>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후반,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시사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反詩 동인>은, 80년대 광주의 소용돌이로부터 시작되는 소집단 문학운동의 절정기인 동인의 시대를 예비했던 것이다.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은
선생이 되어 있었고
스물 세 살 나는 늘
마차산 골짜기의 허둥대는 바람 소리와
쏘리 쏘리 그렇데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물소리와
하숙집 깊은 밤중만 위독해지던 시간들을
만났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막막함은 더 깊은 곳에도 있었다 매일처럼
교무실로 전갈이 오고
담임인 내가 뛰어가면
교실은 어느 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이들이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화가 나 나는 반장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동두川 II」중에서
46년생인 시인에게 처음 다가온 현실은 곧바로 한국동란이었다. 그리고 그가 유년에 맞닥뜨린 전혀 새로운 경험은 미군과 혼혈아. 붉고 검게 분칠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의 시적 공간으로 그는 <동두천>을 택한다. 물론 우리는 시인이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든가 하는 것들을 알 필요는 없다. 단지 출생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아이들의 삶과 음습한 골목과 포주들의 악다구니가 있는 우리 상처의 현대사를 드러내는 공간으로 동두천이 선택되어진 것뿐이다.
동두천은 분명 우리나라의 한 지명에 불과한 곳이지만 막연한 아메리카에 대한 변형된 꿈이요. 혼혈아들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유산의 본향이기도 했다. 동두천은 우리 아버지들이 숙명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오늘로 향한 통과의 문이다. 이 시집은 6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의 리얼리즘이다.
우리들은 헛간 같은 데다 여자를 그렸다 낯붉힌
여자애들이 총무에게 달려가고
함께 벌서고 꿈쩍도 않던 아이 너는
두꺼비같이 불거진 눈두덩에 긁힌 상처 속에서
숨긴 손칼을 꺼내 기둥에다 던지기도 하면서
그 여름 위에 흠집을 만들었다 물볕
쏟아지던 속을 걸어 가을이 가서
바라보면 배고픔조차 견딜 수 없던 긴 날들 지나자
너는 방죽을 따라 힘없이 맴돌기도 하였다 추위 다가와
날마다 더 먼 곳 싸돌던 다리 아래
거지들은 천막을 걷고 떠나가 버렸고
<중략>
우리는 떠났다 들기러기 방죽 따라 낮게 흐르는
여울을 건너면 저무는 들길
모두 밤인데 어느 눈발에
젖어 얼룩지는 마음만큼이나 어리석게
그 세상 속에도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믿음이 만드는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우리들은
힘들게 빠져 나가면서
-「안개」중에서
‘송천동 그 해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육칠십 년대 천막촌의 고아원에서 성장기를 보내던 아이들의 이야기다. 안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막연한 불안함이고 거꾸로 위안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믿음은 (눈발에 젖어 얼룩지는 마음)같은 것이며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힘들게 빠져나가는) 확신 없는 행위들이다. 안개 밖의 세상은 그들에겐 두려운 꿈이요 현실이다. 안개 속에서 그들은 힘들고 궁핍하지만 차라리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이 익숙한 고통에서 벗어나 안개 밖의 세상으로 향한 그들의 걸음은 조심스럽고 두렵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과 버림받은 아이들이 갈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 역사는 항상 그들의 편이 아니었고 희망의 반대편 쪽 삶을 살게 만들었다. 이 시 '안개'는 그들 고아원 아이들의 모습이면서 이데올로기적 상황 속에서 겪어야 했던 약소국가의 비극적 기록들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떤 희망의 모습도 비전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물의 다규멘터리를 찍듯이 고아원 아이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낼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독자들을 함께 우울하게 만든다. 이 우울함의 암묵적 분위기가 바로 안개다. 우리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던 상황의 안개. 우리 현대사 속의 한 단면이다.
운동장을 질러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너희 나라가 생각난다. 탐아
한 나라가 무엇으로 황폐해지는지 나는 모르지만
한 어둠에서 다음 어둠으로 끌려가며
차례차례 능욕당한 네 땅의 신음 소리를 다시 듣는다
내 손에 정글刀만 쥐어진다면
자르고 싶은 것은 敵이아니라 나의 연민이다
불란서 튀기 너는 우린 부대의 마스코트였지만
가난한 나라의 한 병사가 바라본 너는
슬픔이 아니라 미움이었다
「베트남 II」중에서
40년대의 세대는 절망과 모색을 교차하면서 살아온 들찔레같은 운명에 비유된다. 시인이 폐허의 10대를 보내고 맞닥뜨린 20대의 현실은 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국동란이 가져다 준 피폐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날아든 월남전쟁과 파월의 소식은 온 국토를 들끓는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월남전쟁은 세대별로 각기 다른 경험을 갖게 해 준 사건이다. 한국동란으로 허기진 유년을 보낸 시인의 세대에게 전쟁은 하나의 숙명이었다. 이제 그들은 직접적으로 전장에 투입되어 생사를 경험해야 하는 최대의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국군 아저씨들을 위한 송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름도 생소한 온갖 부대 이름을 줄줄이 외면서 파월 장병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네 삼촌이 죽었다느니 다리가 잘려나갔다드니 하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디오 하나 없는 시골구석에서 파월 장병의 노래만 부르는 우리들에겐 전쟁이란 막연함 그 자체였다. 그들의 죽음보다 우리를 더 덜뜨게 했던 월남전쟁은 누구 형님이 돌아올 때 두 손 가득 가져온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옷가지들, 위문공연 온 여가수들과 찍었던 사진 따위였다. 우리들에게 월남전쟁은 이런 새로운 물질에 대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두 축을 지배하고 있었던 미국과 소련. 파병 조건의 반대급부로 얻은 군사력 현대화와 건설 국가로의 전환, 라이따이한의 존재 등을 안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
①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이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네 누이
--「베트남 I」중에서
②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달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東豆川」중에서
①의 시 월남의 몸 파는 아이 로이와 ②의 시에서 시인이 아는 어느 흔혈아는 매우 닮아 있다. 로이가 아이를 낳는다면 역시 국제 혼혈아일 것이며 그 아비는 제 나라로 가서 그 아이의 존재마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 역시 제 나라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서럽게 살아갈 것이다. 시인은 로이를 보며 ‘벌거벗던 내 누이를 생각한다. 내 누이와 로이는 동질의 이름이며 운명이다.
시인은 월남의 전장에서 조국을 생각했다. 능욕 당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능욕 당하는 땅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로이가 낳은 아이들은 시인이 <켄터키의 집>이라 불렀던 송천동 그 바닷가 고아원으로 흘러갈 것이며 알지 못할 두려움처럼 휘감아 오던 안개 속에서 웅크린 채 성장의 숨을 쉴 것이다.
목덜미를 닦으며 사촌은
이제 막 제철인 울릉도와 오징어를 이야기 한다.
물장구를 치며 여름 내내 장구애비처럼 달아
문을 열면 전체가 입 전체가 눈 전체가
바다의 귀를 달고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시절 파도가
거칠게 깨어진다.
깨어진다 눈에 가시를 박아 주며
맨살에 얼음을 비비는 물보라
날은 흐려
턱 밑에 끊임없이 매달리는 수평선을 털어 내며
더는 기다릴 것 없어도 서른은
한 가지 생각을 끝끝까지 흘러 보내게 한다.
바라보면 절반쯤 눈물을 섞고 섰는 오리숲
바람이 쉬임 없이 모래를 퍼나른다
떼 지어
낮게 지붕을 타고 흐르는 물새들
결심은 이내 어두워지고 저 젖은 바다의 힘줄에
모든 것은 또한 감길 뿐
우리들은 묶여 있다 이물을 서로 대고
굳게 묶여서
빈 배처럼 다정하게 흔들린다.
-「嶺東行脚 II」중에서
이 시집 <東豆川>에는 영동행각 연작이 7편이 실려있다. 이 연작 뒤편에 붙은 시 <다시 嶺東에서>를 포함하면 8편이다. 이제 시인은 생활이라는 또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된다. 왜 그가 생활이란 현실의 시작을 영동행각에서 얻어낸 것일까. 영동과 시인과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주 단편적인 정보인 경북 울진이 시인의 고향이란 사실을 나는 알지만 그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데 큰 열쇠가 되지는 않는다.
거부할 수 없었던 10대와 20대를 보내고 이제 막 30대를 시작하면서 영동에 와서 시인의 외연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우리들은 묶여있다 이물을 서로 대고 /굳게 묶여서 /빈 배처럼 다정하게 흔들린다) 저무는 영동 어느 마을에서 시인은 식솔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물을 서로 맞대고 묶인 인연의 끈들을 떠 올리기도 한다. 그 인연들은 다정하고 소중하다 <嶺東行脚> 연작에서도 시인의 현실은 썩 밝아 보이진 않지만, 조금씩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를 걷고 새로운 세상과의 화해를 시작한다.
동해의 바람은 (내 살의 아픈 상처에 붕대를 감아)준다고 느낀다. 서울을 떠나와서 울릉도로 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 섞고 서 있는 오리숲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가시를 찔러 오는 세상 같은 건 /껴안아서 흘려 보내)고 그 곳을 떠날 준비를 한다. 바다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맺어진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노정에서 힘에 의해 결박 당하고 헤어지던 지난 시절의 숙명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비록 이곳이 (깃발을 벗겨 가버리)고, (파도만 들어서 귀뺨을 후려)치는 곳이지만 (이 물결에 마음 붙인 사람들의 오랜 고향)임을 시인은 안다. 이제 시인은 조금 더 따뜻하게 이들을 껴안고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3년 김명인은 <華嚴에 오르다> 외 몇 편으로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한다. 첫 시집 <東豆川>과 다음 시집 <유다 시집>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변모가 많을 것을 생각게 해 주었다. 사실주의적 직관으로 대변되던 그의 경향은 어느새 사물에 대한 폭넓은 관찰과 인식을 통해 사상적 깊이를 구축한 세계로 변모되어 있었다. 첫 시집이 출판되던 그 해 그 달 그 다음날 10·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곧바로 80년대라는 새로운 격동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嶺東行脚>을 거쳐 조금씩 화해의 손길을 맞잡으려는 그에게 현실은 화해를 이루기엔 너무 섣부른 결론이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이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시인은 오히려 내적으로 침잠하면서 결을 고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인이 다다르고자 했던 그 궁극의 것들을 찾기 시작한 셈이다. 혹자는 그 느닷없음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의 귀결은 일견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이 시집 <東豆川>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시집 3부에 해당되는 <高山行>외 몇 편의 시들과 5부를 구성하는 <復活>외 몇 편의 시들은 그의 시적 변모를 위해 제공된 복선의 시편들이다.
삽을 들어 산오리나무 밑중을 파헤쳤다.
살은 썩어서 다시 집이 되는 흙 속에서
아버지, 이제 태어나시는 아버지
산 그림자를 깔고 앉아 눈부신
흰 뼈를 추리면서
잿속에 그이 이름을 털어넣고 일어섰다.
굽어보면 荒天 끝까지 바람을 섞고 있는 바다.
동해여,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빠져서
내 기댈 곳 없을 때 서로 마구 서야 하느냐?
문득 조롱새 한 마디가
주르르 등덜미를 치며 흘러간다.
<중략>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은?
그리고 제 모습은?
마침내 나를 풀고 한 점 구름이
멀리 청운을 흩으며 떠나간다.
-「移葬」중에서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아버지를 부른다. 부활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다거나 생멸의 일치를 느끼는 일 등은 훗날 시인이 화엄과 유적에 오르는 시편들과 다르지 않다. 몇 동가리의 흰 뼈를 추리고 바다를 바라볼 때 마주친 조롱새 한 마리가 등덜미를 치고 날아오른다는 구절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華嚴에 오르다>는 구절의 의미는 지극히 유사하지 않은가. 이 시집 <東豆川>은 육칠십 년대의 리얼리즘이지만 군데군데 묻어나는 시인의 내적 갈망이 앞으로 변화될 시의 경향을 다소나마 예고하고 있기도 했다.
처녀 시집은 시인에겐 첫 아이의 출산처럼 두근거리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쉬이 잊어버린다. <시와 생명>에서 기획한 '다시 읽는 추억의 시집'은 잊혀진 시집들을 끄집어 내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그 시인의 변화와 모색의 과정을 짚어보고자 하는 취지다. 시인은 누구나 불멸을 꿈꾼다. 오늘 나의 영혼이 불멸의 것이라고 믿고 치열하게 창작의 길을 간다. 하지만 시대는 우리의 욕망과는 달리 몇 사람의 가인만을 선택한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이 코너에 첫 시인으로 김명인 시인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잊혀진 시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누구 못지 않게 왕성한 시업의 현역이며, 많은 독자들을 갖고 있고 문단의 비중도 크다. 하지만 그런 성공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잊혀져 갈 수 밖에 없는 첫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지난 시절의 열정을 되새겨 보긴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70년대의 말미에서 그 시대를 정리하는 시집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80년대의 시들이 흘러갈 방향을 함께 예고해준 의미 있는 시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의 김명인 시인의 노래가 다소의 사변성과 형이상학적 난해함의 모습을 띄고 있지만, 결코 이 시들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토양이 되게 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 큰 기쁨이었다.
-http://blog.daum.net/moonnj/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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