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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1.
현대시조의 대다수는 삶의 현존적 조건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응시를 보여준다. 정형률은 내부적으로 의미의 완결성을 추구하므로 시조시인은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세계관이나 세계상을 제시하여 의미 단위가 확정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비해 자유시의 경우에는 애초에 완결시켜야 할 의미의 단락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내외부가 개방된 틀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의미의 완성을 독자에게 넘기는 방식을 사용할 수가 있다. 이는 정형시와 자유시가 내적 의미의 확정 방식 면에서 차별성을 갖는 까닭이다.
시조의 종결 양식인 종장에 이르러서는 시상이 집약되고, 아울러 시인의 세계상의 일단을 드러내면서 진행되어온 의미 단위를 결속시키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시조에서는 생의 본질과 관련된 투시가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교술과 서정의 갈래 구분을 난감하게 하는 일면도 없지 않지만, 독자들을 향해 보다 명료하게 자의식과 세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조가 가진 고유의 미학이자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상의 언급은 시조의 정형 양식이 삶의 현존에 대한 각성과 실존됨을 이야기하기에 적합한 장르라는 가설을 성립시키는 근거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을 사유, 욕구, 감정 및 행동의 통일성으로서의 인간존재의 실현으로 이해한다. 그는 “자기―스스로를―자신의―존재―속에―드러내는―활동”을 관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의 위치(사유하고, 욕구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에서 세계에 대한, 타인에 대한, 신에 대한 관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실존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생성되며 과정적 상태로 인식된다.
이우걸 시조의 대부분은 ‘실존됨’의 양상을 상황 제시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면밀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조에 나타난 실존의 양상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타자와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실존이며, 다른 하나는 운명과 단독자로서의 근원적 고독에 기댄 존재론적 실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한계 상황을 한계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죽음, 고통, 투쟁, 죄책의 상황이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한계 상황임을 받아들여 회피하지 않고 감당한다는 뜻이다.1) 이우걸 시조에서 현실적 한계 상황에 대한 인식은 환유적 장치나 상황 서술을 통하여 제시된다. 아래 시조 〈비누〉에서는 김씨의 환유물인 ‘비누’를 통하여, 사회적 삶에 대한 성찰을 진행한다.
이 비누를 마지막 쓰고 김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하나.
도시는 원인 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 김씨가 쫓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 위엔 쓰다 둔 그 비누만한 달이 하나 떠 있다. ―〈비누〉 전문
시의 내용을 따라가면, 김씨는 오늘 죽었는데 그가 마지막 쓰고 간 ‘비누’가 생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 알다시피 비누는 지방산이 염기와 합성된 덩어리이다. 이 비누는 사람의 몸에 붙은 잡것들에 흡착되어 소모됨으로써 몸의 청결을 유지하도록 하는 덩어리이다. 비누는 사용에 따라 용량이 점차 줄어들어 간다는 점에서 죽음에 다다른 김 씨 생의 유한성과 겹치며 김씨의 죽음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름덩어리인 김 씨 몸이나 비누는 상호 유사성을 바탕으로 비누가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공장 노동자인 김씨의 사회적 삶을 부각시킨다.
시의 문면만으로도, 김씨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쫓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에서 드러나는바, 그가 생전에 간직했을 ‘실존됨’의 단어는 ‘보살핌’이다. 보살핌은 타인의 곤궁을 주체의 내부로 끌어들여 공감을 이루고, 이 헐벗음을 함께 감당하며 해결해 나가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행동의 표현이다. 그는 이로 인해 ‘쫓김’을 당하게 되고, 그가 위치한 공간도 ‘자산동 언덕길’이라는 궁벽진 곳이다. 그가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하고 헐벗은 노동이 진행되는 상황적 조건은 “도시는 원인 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와 같은 상징적 매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원인 모를 후두염’에 걸렸다는 점에서 노동조건의 열악함과 동시에 공해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김씨는 그와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고, 이와 직간접인 영향 아래 ‘오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수 종장에 제시된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는 현존재의 구속 요건을 치유하는 존재가 되고자 했던 김씨를 비누로 환유하였기에, 비누는 그의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로 다시 비유된다. 둘째 수의 종장에서는 도시의 언덕길 위에 달이 떠 있는데 “쓰다 둔 그 비누만 한” 달이다. 노동자의 소모적인 삶이 비누의 소모성과 닮아 있고, 후두염을 앓는 도시의 하늘에 떠오른 달빛조차도 그 소모성의 물질을 닮아 있다.
사회적 실존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존재자가 자신의 현존재의 조건에 자신을 존재시켜야 한다. 즉 자기가 속해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위치시키고 바라보는 객관화된 시점이 필요하다. 〈사무실〉은 면밀한 상황 묘사를 통하여 현존의 조건을 제시한다. 이 시조의 시적 분위기는 정오의 시간만큼이나 피로감에 젖어 있으며 상호 소통이 단절된 상태이다.
시계가 눈을 비비며 열두 시를 친다 반쯤 남은 커피잔은 화분 곁에서 졸고 있고 과장은 혀를 차면서 서류를 읽다 만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의자들은 말이 없다 창밖엔 클락션 소리 목 쉰 확성기 소리 자세히 들여다보니 벽에도 금이 가 있다. ―〈사무실〉 전문
사무실은 정신적 노동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시계가 눈을 비비며/ 열두 시를” 치는 시간 “커피잔은 화분 곁에서 졸고 있고/ 과장은 혀를 차면서 서류를 읽다 만다.”의 실내 풍경은 무료한 시간만큼이나 심리적 간극이 반쯤 남은 불투명의 커피잔에 담겨 있다. 시간은 그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의자들은 말이 없”는데, 이와는 다르게 밖에서는 부산한 생활의 현장성이 소음과 함께 벽을 타고 넘어온다. “창밖엔 클락션 소리 목 쉰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실내의 풍경이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으로 고여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부 구성원의 심리적 간극에 연유하는 것으로 읽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벽에도 금이 가 있다.”에서 보여주는 균열에서 ‘~에도’가 보여 주는바 과장 이하의 직원들 간에 사무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 “과장은 혀를 차면서 서류를 읽다 만다”와 같은 업무상 불일치에서 오는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무겁게 가라앉은 〈사무실〉의 풍경이 구성원들의 심리적 긴장과 간극, 그리고 일상적 삶의 비루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산인역〉은 사무실이나 노동의 현장에서 쫓겨난 실직자의 아픔을 비 내리는 풍경으로 표현하고 있다.
8월 하순 다 낡은 국밥집 창가에 앉아 온종일 질척이며 내리는 비를 본다 뿌리도, 없이 내리는 실직 같은 비를 본다.
철로 건너편엔 완만한 산자락 수출처럼 부산하던 철쭉꽃은 지고 없는데 살아서 다졌던 생애의 뼈 하나 묻히고 있다. ―〈산인역〉 전문
시적 화자는 “다 낡은 국밥집 창가에 앉아” 질척이며 하루 종일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본다. “수출처럼 부산하던 철쭉꽃은 지고 없는” 쓸쓸한 계절에 경기의 하강과 함께 일자리를 잃고 허술한 국밥집에서 주린 배를 채우는 시간, 건강한 노동의 터전에서 밀려났으므로 뿌리 뽑힌 삶의 양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시간에 부유하는 물방울들이 질척이며 내리고 있으므로, 뿌리 뽑힌 실직의 모습과 닮아 있다. 첫째 수에서 현존재의 부박함이 두드러졌다면, 둘째 수에서는 삶 이후의 근원적인 공간으로 전이되어 산자락에 묻히는 “생애의/ 뼈 하나”의 일에 눈길이 머문다. 철로변에 내리는 비는 잿빛으로 질척이는 삶의 형상을 은유하며, 이윽고 뼈 하나로 묻혀야 하는 부박한 노동자의 일상을 더욱 퇴락한 빛깔로 물들인다. 질척이는 삶의 무게는 〈낮술〉에서 “나는 목말라 빈속에 술을 마신다”와 같이 내부에서는 갈증과 함께 뜨겁게 발화되지만, 사회적 조건은 “하수구 밑으로 흐르는/ 신음소릴 듣지 못”하며 쉽게 이윤과 손을 잡는 정신적으로 황폐한 상태이다.
신작 〈아직도 우리 주위엔 직선이 대세다〉에서 반복되는 구절과 같이, 직선은 신속, 효율, 획일성, 편의성의 개념과 결합된 근대적 공간 표상이다. 직선의 공간 현상학에서는 굽어지거나 휘어진 곡선은 무가치하며 낭비의 징표라고 생각하기 쉽다. 직선이 대세인 이 시대에 “쉽고 편하고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직선은 굳으면 칼날이” 되기에, 그 자체로 공격적이며 배반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
이상에서 살핀바, 시적 주체의 시선이 현존의 조건을 성찰하고 실존됨을 위한 방향성을 예비하고자 하는 까닭은 타인의 실존에 동참함으로써 사회적 실존됨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3.
유한적 존재에 대한 한계상황이 나뿐만 아니라 타자에게도 동일함을 느낄 때 진정한 실존 속에서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 함께 존재하게 하고, 타자의 유한성에 동참하는 보편적 감수성을 획득하게 된다.
1 동생처럼 먼저 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다가 별스런 욕심 없이도 그녀를 건너게 되고 우리는 그때 일어나 한 그릇의 물을 찾는다.
놋그릇에 담겨 있거나 더운 가슴에 고여 있거나 더 깊숙한 어디에서도 우리가 만나야 하는 해갈의 고운 영토를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2 둔탁한 벽시계가 하루를 밟고 가고 밟고 가며 남겨두던 검붉은 그늘은 자라 어느 역 뜨락엔 지금,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물〉 전문
〈물〉에서 아내는 동생처럼 자연스럽게 잠이 들어 있다. “먼저 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는 까닭은 아내가 있는 그 자리가 너무도 익숙해서 동생처럼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가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와 남편으로 맺어졌다는 특별한 감정보다는 개별자로서 서로의 생을 긍정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때 일어나/ 한 그릇의/ 물을 찾는” 행위는 보편적인 생의 방법이며, 내 존재 안에 아내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일이다.
함께 일어나서 물을 찾고 이 물을 나누어 마시는 일은 물질로서 물이 몸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수에서는 ‘물’의 의미가 더 깊어진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해갈의 고운 영토를 기다리고 일구는 일은 내밀성의 행복을 찾아가는 일이다. 놋그릇에 담겨 있는 물과 가슴에 고여 있는 물은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의 충족성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에서 ‘물’은 두 사람이 합치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다. “더 깊숙한 어디에서도 우리가 만나야 하는/ 해갈의 고운 영토를/ 기다리며 사는 것”은 부부로서 현존적으로 맺어져 있고, 이 현존재의 각성을 통하여 애정의 폭을 깊게 한다.
〈물〉―1은 나와 아내의 실존이 합치되는 지점에 물을 찾고 해갈의 고운 영토를 확장해가는 내밀성의 시공간이다. 이에 비해 〈물〉―2는 앞부분과 대립되어 어차피 나란, 혹은 나의 실존이란 단독자로서 숙명적인 유한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로써 〈물〉―1에서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탄식처럼 기다림을 이야기한 연유가 밝혀진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유한자이기에 숙명적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생명체이며, 아내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바꾸어보면 자신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역 뜨락엔 지금, / 가을비가 내리고 있”는 시간은, 우주적 시간이며 그 우주의 귀퉁이에서 단독자로서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는 삶의 궤적을 환기시킨다. 더구나 ‘가을비’는 차갑게 존재를 적시면서 유한자로서의 현존적 조건을 강하게 일깨운다. 실존자인 나의 유한성과 고독감은 둔탁한 시계의 길을 따라 근원적 고독을 키워가면서 “검붉은 그늘”처럼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연민의 감정은 유한자로서의 한계상황을 인식한 결과이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실존으로 불러들여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한자의 운명적 고독이 가중될수록 연민의 강도가 높아진다. 〈달맞이꽃〉에서는 달맞이꽃을 “장님이 데리고 가던/ 어느 딸애의 살결 같은 꽃”으로 은유하는데, 장님의 운명성과 어느 딸애의 살결 같은 무구함이 동시에 겹쳐지기에 울림이 크다. 장님의 단절감에 대비된 딸애의 무구함은 이질적인 것으로 의미 간의 격차가 커서 긴장을 유발시킨다. 그 긴장만큼 의미의 폭은 심화된다. 아름다움과 단절, 그리고 단명성은 비극미를 유발시키는데,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또 단명할수록 현존의 한계가 절실해진다. 이 지점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팽이〉를 불러내야 한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전문
사역형으로 시작하는 “쳐라”의 단호한 의지는, 현존재의 조건이 가혹한 자기 단련을 통해 극복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단독자로서의 운명적 결함은 “가혹한 매”를 통하여 단련되어야 하는데, 그 극점은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이다. 이육사의 시 〈절정〉의 끝 부분인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에서와 같이 무지개는 가혹한 자기 단련을 통해 도달한 절정이자 환희이다. 그것은 아픔을 벗어난 초극의 경지이다. 현존재의 한계상황을 초극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참다운 실존을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중장에서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의 의미는 부조리한 시련의 매를 증언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자기 단련이 운명적 조건을 초극하는 방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됨을 이루기 위한 추구의 과정임 보여주는 것이다. 종장의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는 결론을 유보한 과정적 삶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접시꽃이 피었다 지는 순간은 자기에게 허여된 유한자의 실존이자 전 모습이라 보아야 한다.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실존을 딛고 피어난 꽃이면서 그 유한의 시간을 통해서 전 존재를 발현시킨다. 운명의 채찍에 휘둘리지 않고 팽이가 회전을 멈추게 되면 유한자로서의 삶도 끝나게 된다. 우리의 몸과 정신 혹은 영혼은 영속적인 운동 과정에 있다. 휴식은 없다. 정지라는 이름은 곧바로 죽음을 호명하므로.
바코드를 붙이고 있는 〈꽃〉에서는 절정의 순간에 운명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운명은 본래의 답을 감추고 있다. 여기서 꽃은 유한성을 환기하는 생의 은유물이다. 조금씩 덜 핀 모습을 “보충질문처럼 조금씩 열려 있”다고 한다. “벌들은 그 문을 잘 알고 드나”들지만, 가련한 꽃들은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생의 유한 때문에/ 항상 웃고 있지만 슬픈 바코드”로 비친다. 운명적으로 바코드가 찍힌 꽃들, 그것은 어쨌든 물질적인 측면에서 유통기한 내에 값을 치루는 슬픈 존재일 수밖에 없다.
Ⅰ 꽃들은 보충질문처럼 조금씩 열려 있다 벌들은 그 문을 잘 알고 드나든다 친수성(親水性) 잎들이 빚은 신록 같은 이 아침.
Ⅱ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생의 유한 때문에 항상 웃고 있지만 슬픈 바코드다 꼭 한번 맞고 싶었던 이 절정의 순간에도.
Ⅲ 언젠가 일궈야 할 나만의 영토를 위해 상처만큼 더 깊숙이 문신을 새기며 산다 향 깊은 목숨일수록 억센 가시 세우며.
Ⅳ 유통기한 지난 것들은 사체처럼 부식한다 전율과 응혈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받은 명 곱게 익혀서 씨앗으로 남기기 위해. ―〈꽃〉 전문
인간에게 현기증처럼 흔들리며 다가오는 불안감, 그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을 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유한자로서의 근원적 고독에 처해진다. “언젠가 일궈야 할 나만의 영토를 위해/ 상처만큼 더 깊숙이 문신을 새기며” 살아가는 것은 꽃의 운명이자, 이 꽃을 바라보고 의미화하는 시적 주체의 자기 선언이다. 이 유한성의 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고 만다. “유통기한 지난 것들은 사체처럼 부식한다/ 전율과 응혈이 그 안에 담겨 있”는데, 그와 같은 부패와 응혈의 시간은 또 다른 예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받은 명 곱게 익혀서 씨앗으로 남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것들로, 슬픔을 동반한 절정감과 상처가 남긴 문신 그리고 전율과 응혈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싹을 틔워 만개하고 쇠락하면서 씨앗을 남기는 꽃의 일대기 중에서, 단 한 번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은 절정감 속에서 생의 유한성을 강력하게 환기함으로써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4.
지금까지 이우걸 시조에 나타나는 실존의 양상을 사회적 실존과 존재론적 실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시인이 치렀을 실존됨의 정도는 발표된 ‘시’에 의해 평가받을 터이다.
이즈음에서 이우걸 시인의 작품 세계를 두 가지 줄기로 해석한 이정환의 평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두 계열로 읽힌다. 첫째, 언어 자체가 주는 예술 미학이다. 아주 모던한 면모를 드러낸다. 둘째, 사회성 짙은 현실 인식의 세계이다. 결연한 대항 의지를 표출하거나 문명의 이기(利器)를 질타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이 두 가지가 혼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된 ‘사회성 짙은 현실 인식의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사회적 실존과 존재론적 실존의 무게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우걸 시인의 시업이 현존재의 제약을 벗어나 참다운 실존됨을 추구하는 생의 일환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낯 붉어지는 수다구나 싶다가도 지나온 행로의 남루함을 떠올려 보면 차라리 이렇게라도 위로받고 싶어진다. ―〈프로필〉 둘째 수
신작 〈프로필〉에서는 새 시집을 앞에 놓고 ‘졸음’이 밀려오는데, 이는 존재가 환기하는 피로감으로 볼 수 있다. 졸음에서 깨어 “우연히 내 사진 아래의/ 프로필을” 보고서, “차라리 이렇게라도/ 위로받고 싶어”지는 것은 생의 역정과 추구의 과정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리라.
염창권 |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시조), 1996년 〈서울신문〉(시)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햇살의 길》, 비평집으로 《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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