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적 상상의 지평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7) |
| 붉은 달 유병록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 개의 심장 그러니까 오래전 붉은 달이 뜬 적 있었던 거다 아무도 수확하지 않는 들판에 도착한, 이를테면 붉은 달이라 불리는 자가 제단에 올려놓은 촛불처럼, 그것이 유일한 제물인 것처럼, 어둠 속 에서 빛났던 거다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들판을 지켰으나 아무도 매장되지 않은 들판이란 없다 붉은 달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것, 사방으로 솟구친 붉은 빛 이 들판을 물들였던 것 이것은 토마토밭 사이로 구전되는 동화 피 뿌린 대지에 관한 전설 그를 기리기 위해 운집한 군중처럼 올해의 대지에도 토마토는 붉게 타오른다 들판 빼곡히 자라난 붉은 빛이 울타리 너 머로 흘러넘친다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 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 빛 붉은 달이 뜬다 # 언어의 사지를 이리저리 비틀어 한껏 멋을 부린 시들을 만날 때마다 시인도, 시도 모두 안쓰러울 때가 많다. 언어에 대한 가혹한 고문이라는 생각은 분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유병록 시인의 시는 언제 보아도 신뢰가 간다. 억지로 꿰어 조작한 이미지도 없고, 모호한 의미의 덤불로 빈약한 사유를 위장하는 경우도 없다. 그는 정직하게 현실을 읽고 발언하는 시인이다. 이 시에는 세 개의 축이 있다. 토마토-달-나. 서로 교응하고 수렴하면서 동일한 의미 선상에 놓여있는 사물들은 각각 아름답게 분광한다. 그 광휘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신화적 아우라를 형성한다.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 개의 심장’인 토마토는 2연에서 ‘붉은 달’ 로 비약한다. ‘붉은 달’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람인 것.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견딘 자인 것. 높은 곳에서 추락한 좌절과 절망의 다른 이름인 것. 들판을 물들인 그의 피는 다시 ‘토마토’로 재생하고 ‘붉은 빛이 울타리 너머로’ 흘러넘치는 것이다. 신화적 상상의 지평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순간이다. 달은 본래 신화적 상징물로 생성, 탄생, 소멸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순환적 생명을 지닌 천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 / 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 빛’은 재생과 부활의 영토로 이끄는 생명의 탯줄이며 구원의 상징물이다. 다시 ‘붉은 달’이 떠오르는 순간 지상과 천상은 하나로 연결되고 지상의 삶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여 빛을 뿜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탄탄한 구조한 내밀한 시적 정서를 바탕으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현상을 읽어낸 시이다. 이만한 시적 역량과 진지함을 갖춘 시인이 흔치 않은 현실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신인은 신생독립국의 제왕이며 독재자이다. 누가 뭐라 해도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길을 가야 하고 시류에 휩쓸리거나 영합해서도 안 된다. 유병록이 쓸 수 있는 시는 셋이나 넷이 아니라 오직 하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 뿌린 대지’에서 발을 떼지 않는 것, 철저히 남과 다른 혼자만의 길을 가는 것. 이 두 가지일 것이다.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시 쓰기에 대한 내 나름의 태도나 습관 - 오세영 (0) | 2014.02.03 |
|---|---|
| [스크랩] 가시연꽃의 기도 / 이민영외 3수 (0) | 2014.02.03 |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이대흠 - 옛날 우표 (0) | 2014.02.03 |
| [스크랩] [북리뷰] 그리움을 변주하다 / <한영옥 시집>-다시 하얗게 (0) | 2014.02.03 |
| [스크랩]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의 시 / 신진숙 (0) | 2014.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