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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 이숭원 서평 - 독거의 표상, 애매성의 매혹, 황학주 시집,『某月某日의 별자리』

문근영 2014. 1. 15. 08:39

독거의 표상, 애매성의 매혹

ㅡ시집,『某月某日의 별자리』 2012년, 황학주 『지혜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 서울여대 교수)

 

 

 

 

모든 말에는 그늘이 있다. 무색투명하고 무미건조한 말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이라고 말할 때 그 단어에는 다종다양한 의미의 층이 겹쳐 있다. 꽃이라고 말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똑같은 꽃의 영상이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는 이러한 언어의 그늘을 최대로 활용한다. 하나의 말이 자아내는 다양한 영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결합하여 말과 말을 연결함으로써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을 창조한다. 이런 점에서 시는 최신 3D 영화보다 더욱 다채로운 영상을 창조할 수 있다.

 

황학주의 시는 언어의 그늘을 최대로 활용하여 새로운 영상을 창조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55.5%의 난해성을 견지한다. 그러나 44.5%의 가해성이 나머지 난해성을 해독하는 데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시상 파악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한번 읽어서 쉽게 알 수 있는 시 중에도 물론 좋은 시가 많지만,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에게 그런 시는 좀 싱겁게 비칠 수 있다. 몇 번 거듭 읽고 머리를 한참 굴려야 비로소 그 뜻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시가 지적인 독자에게는 쾌감을 준다. 황학주의 시는 예민한 독자에게 바로 그러한 지적 호기심과 지적 쾌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우리 시문학사의 시인 중 이상은 지적 호기심은 불러일으켰지만 지적 쾌감은 주지 못하였다. 김기림, 김경린, 조향 등은 지적 호기심보다는 표현상의 새로움을 조금 보여주는 선에 머물렀다. 정지용은 어느 정도 지적 호기심과 쾌감을 충족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수영은 새로운 언어형식에 현실비판의 요소를 결합함으로써 지적 호기심과 지적 쾌감을 함께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비해 황학주는 언어를 통해 환기되는 심미적 영상의 창조에 초점을 맞춘다. 순수한 미학주의가 황학주의 시 의식을 이끌고 있다.

황학주의 시 의식을 이끄는 또 하나의 지주는 시간에 바탕을 둔 생에 대한 성찰이다. 이것은 시집의 자서에 명기한 두 단어, 시간과 사랑이라는 말에 내재해 있다. 여기서 시간은 역사의 의미가 아니라 생의 흐름을 의미한다. 사랑 역시 종교적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적 사랑을 의미한다. 에로스적이면서 그의 감각의 촉수는 극진하고 아낌없는 합일의 사랑을 지향한다. 달랑 그것 하나,홀림, 11, 당신 빼고는 다 지겨웠어에서 보는 것처럼 독거의 공간에 타오르는 운명적인 사랑을 사색하고 있다. 요컨대 황학주는 내면에 일렁이는 사랑의 지향과 시간에 바탕을 둔 생에 대한 성찰을 순수한 미학주의의 구성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시간에 대한 상념은 다음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강아지!

 

?

 

아무 흉허물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들에 대해

걱정인 시간

부를 때마다 짚이는 잎사귀 눈에 비치고

호명 되는대로 빗방울은 떨어져 내리어

그 위로 구르고

 

耳順은 낼모레나 날씨 봐가며 오는 연인이라 해야겠지만

시간을 스치는 한 火傷은 가질 것이다

 

어느 나뭇가지에서 새끼나무는 자라고

어느 이별은 하루가 짧아진 이별을 달고 가고

 

말똥가리!

 

가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게, 진짜 그 생물 안에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耳順전문

 

 

이순을 앞둔 시인이 시간과 생의 흐름과 사랑에 대해 명상을 펼쳤다. 그러나 평범한 진술의 방식이 아니라 시적인 비약과 분절의 어법을 취했다. 그는 언어의 미학을 최대로 살리려 한다. “아무 흉허물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우리는 몇 개나 가지고 있는가? 60년 가까이 살아오지만 아무 흉허물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몇 십 년 된 친구들도 이미 적절한 호칭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어릴 때의 현식이는 지금 민 교수라고 부르고,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 진경이는 퇴직을 했어도 여전히 송 상무라고 부른다. 아내는 저기라고 부르다가 문기 엄마라고 부르다가 최근에야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60이 다 되어서도 강아지!’ ‘말똥가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상대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시간은 흘러 잎은 피었다 지고 빗방울은 떨어져 구르다 멈춘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이별 또한 또 다른 이별을 물고 왔다 간다. 쥐가 쥐꼬리를 물고 풍덩하듯이 생의 흐름은 단절 없이 이어진다. 이순을 낼모레나 날씨 봐가며 오는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설사 시간이 화상처럼 험한 상처를 남긴다 하더라도 날씨 좋을 때 찾아주는 연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날씨가 나빠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름 부를 수 있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은 아름답다. 설사 이별이 또 하나의 이별을 물고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늘 부르던 그 이름이 잠시 떠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황학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이어지는 사랑에 대해 명상하고 있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옛날 극장이었다

 

텅 빈 극장 2층 앞줄에

한쪽으로 살짝 기운 흰 종이학처럼

만나긴 하였다

 

어두운 불빛에 물끄러미

너무 구겨진 심장 박동이 살았다

 

극장에 비치된 담요를 무릎에 덮고

둥글고 얇은 아몬드 쿠키

덜 자란 달 같은 그걸 반으로 쪼개먹었다

밝아지다 어두워지다 하는 스크린 불빛에 비추면

상처는 대충 반이 되었다

 

젖고 얼어터진

인간 세상의 榮華,

팔랑개비처럼 릴이 돌아가는 동안

사랑을 들고 뛰어다니긴 하였다

 

그런 길가

꿇고 앉은 무릎 위에 얹고 싶은 피 묻은 물새의 발이 떠올라

목젖을 밀고 올라오는 갈대밭을 키우기도 하였다

 

담요를 덮고 앉아 앞을 바라보는

두 조각이 난 얼굴

이제는 옆 사람의 무릎까지 이 담요에 감쌀 수 없는

가장 슬픈 영화를 본다는 생각마저 눈앞에 깜박거렸다

물새가 울듯 영사기가 삐걱이고 귀가 시릴 때까지

불과 두 시간

 

영화를 보고 나오자

둥글고 흐릿하게 뭉쳐진 흰 종이학

떠 있었다

또 겨울밤이었다 오래된,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옛날 극장이었다전문

 

 

이 시는 황학주의 낭만적 유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의 하나다. 시의 구성은 추억의 인상화로 채색되었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구절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생의 항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생의 여로는 구체적인 현실의 단면에 터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 영사기에 돌아가는 필름 릴처럼, 혹은 영사막에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의 교차처럼 환영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한쪽으로 살짝 기운 흰 종이학의 형상이 그런 환영의 형식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사랑의 설렘은 심장 박동으로 표현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랑의 감미로움은 둥글고 얇은 아몬드 쿠키/덜 자란 달 같은 그걸 반으로 쪼개먹는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미학적 구성은 절묘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 둘이 나누는 사랑의 위안은 상처는 대충 반이 되었다라는 구절로 표현된다. 때로는 격정과 슬픔이 차올라 목이 메기도 하였다. 그렇게 둘로 나뉜 한 얼굴처럼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며 영화를 보았지만 생은 여전히 쓸쓸하고 아픈 것. 독거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형벌처럼 달려든다.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나왔지만 둥글고 흐릿하게 뭉쳐진 흰 종이학그 독거의 영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밖의 현실 속에서 그 둘은 분리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전달한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옛날 극장을 벗어나면 다시 고독의 시간이 찾아오고 오래된 겨울밤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영위하는 생이고, 한정된 시간 속에 펼쳐지는 유한한 인간의 사랑이다. 이렇듯 고독한 인간의 축도를 이처럼 모호하면서도 매력 있는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황학주의 장기다. 생의 허무에 대한 미학적 반응, 허무주의와 미학주의의 찬란한 융합을 다음 시처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알전구가 나간

찬 방 안에

파도소리 아물 때까지

별이 빛났다

 

한때 손이 닿던 기억들은

별자리 속에

나뭇결만 남은 것처럼

높이, 어두운 채로

반질거린다

 

내가 굴복하기 전에

이미 내 마음을 읽은 사랑들

사랑했다 하여도

떨어져서 빛나야 했을 당신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일생 속으로 울었을 어머니의 도시들

똑같이 나눌 수 없었던 밥의 슬픔들까지

 

오늘 저 별자리의 독거,

눈물 많이 지나가

물때자국 선명한

이 모든 某月某日

-某月某日의 별자리전문

 

 

시간의 흐름이 지워지지 않는 파국과 상흔을 남기는 것 같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고 나면 텅 빈 백사장처럼 우리의 생에는 별로 남은 것이 없다. 그날이 그날 같고 이때가 그때 같은 것이다. 오래된 전구가 나가고 어둠은 어둠으로 이어진다. 찬 방 안에 어둠이 깊어가고 파도소리 잔잔해질 때까지 별빛이 전구의 빛을 대신한다. 어둠 속에 파도소리 들리고 별빛만 반짝이니 온갖 기억들이 뇌리에 명멸한다.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깝던 기억도 멀리 가물거리며 사라지고 가까운 기억과 먼 기억의 차례도 지워지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늘의 별자리에는 인간의 사랑과 고독과 갈등이 스산하게 스쳐간다. 거기에는 자식에게 헌신적 사랑을 바치는 어머니의 슬픔 같은 생활이 담겨 있고 최소한의 식사조차 함께 나누지 못했던 생활의 비애가 젖어 있다. 그런 많은 사연을 함축한 채 별자리는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삶의 굽이마다 슬픔의 사연 스며들어 물때자국 선명하지만 우리는 동떨어진 별자리처럼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날이 그날 같지만 오늘이 내일로 바뀌듯 그렇게 이어지는 생의 단면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생의 항로는 개별적 특정성보다는 만인 공유의 보편성을 향해 진행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다음의 시는 뚜렷한 형상을 매개로 하여 생에 대한 명상을 더욱 선명하게 펼쳐 보인다.

 

 

…… 까만 구름이 벌어지며

금빛이 흘렀다 꿀빛, 이라 말해야 할

막 깨뜨려진 밀랍의 촉촉한 밀도를 열고

지고 있는 해라고 우리가 부르는

그 순간 어딘가를 향해 뜨고 있는,

 

나는 멍하니 꿀빛을 핥는다 입술이 벌어지며

안나푸르나 雪山 위 꿀빛이 스며 나온

저물녘 그 5,

까만 구름에 대해 생각한다

까만 구름 속 고요를 학습한 꿀빛에

맞장구치는 먼 종소리

 

…… 흐른다…… 위대한 건 역시

허공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허공 아닌 데서 內傷이 어떻게 이처럼 스미리

 

당신의 텅 빈 몸을 쓰다듬는

내 시선의 열 손가락 솜털들까지

꿀빛 정적을 학습한다 모든 빛이 깜깜히 꺼지기 전

충분히 무량한…… 꿀빛

…… 속으로……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아뜩해진다

-5, 꿀빛전문

 

 

 

안나푸르나 설산에 해가 질 무렵, 까만 구름이 벌어지며 환한 금빛 해가 잠시 몸을 드러냈다. 시인은 저물녘 그 5이라고 썼다. 심리적인 시간이므로 5분이 맞을지 500초가 맞을지 알 수 없다. 시인은 까만 구름이 벌어지며 나타난 금빛 햇살을 꿀빛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금빛이 새어나온 정경의 질감 때문이다. 그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막 깨뜨려진 밀랍의 촉촉한 밀도를 열고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윤기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햇살은 분명 지는 해의 잔영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또 한편으로 그 순간 어딘가를 향해 뜨고 있는모습 같기도 하다. 소멸과 신생이 접합하고 하강과 융기가 교차하는 상상을 시인은 한 것이다. 5분 가까운 시간 동안 허공은 꿀빛의 향연을 연출했다. 어디선가 먼 종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연출하는 허공은 위대하다. 그리고 허공은 자연과 인간의 모든 상처를 포용하고 어루만지는 것 같다. 상처를 포용하는 허공을 시인은 위대하다고 상상했다. 암흑의 밤이 오기 전 태양이 마지막으로 연출하는 꿀빛의 축제는 어둠의 전초전으로 충분히 황홀하다. 충분히 무량한 허공의 내막으로 가냘픈 나비 한 마리 현기증을 느끼듯 팔락이며 사라진다. 그 둘의 대비는 생의 두 차원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상처를 감싸 안는 무량한 허공과 허공에 깃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연약한 인간의 자아를 대비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흰 도화지를 둥글게 오려

벽에 붙였다

 

집 앞에 떠있는 예쁜 섬들의 이름도 외우지 않는

나는 이제 누구의 마음도 훔치고 싶지 않아

때마침 내 안의 멍울에서 우려 나오는 노을빛을 바라보는 것인데,

내가 훔치고 싶은 건 허공의 내 얼굴

가볍고 낡은 악기 주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허공을 헛디디며 내려오는 바람이 마른 붓으로 쓰다 지우는

 

종이로 만든 둥근 거울을

하루 한번 들여다본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나의 발굴은 나날이 깊어져가고

기나긴 해안선으로 흘러가는 바람을 그리듯 여전히 난항이지만

누구의 입김도 서리지 않으니

찾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 나에 가까울 것이다

바래긴 해도 종이 거울은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삿짐 중 단 하나 가방에 넣어 직접 옮기는

흰 종이 거울

 

책꽂이 사이로 어둑어둑 밀물 드는 날

어떤 얼굴은 이처럼

우리 마음이 가진 몇 개의 둥근 우물의 백지로부터

소리 없이 발효되는 따뜻한 밑바닥으로부터

그리하여 몇 줄의 시로부터……

-종이 거울을 보는 남자전문

 

 

 

황학주의 거울은 유리 거울이 아니라 종이 거울이다. 종이에 얼굴이 비칠 리 없지만 그는 종이 거울을 벽에 걸어두고 길을 떠날 때는 직접 그것부터 챙긴다. 이것은 그의 귀중한 재산목록에 해당한다. 감각적 대상에 대한 애호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누구의 마음도 훔치고 싶지 않을 때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허공의 내 얼굴이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미학주의의 어법을 잠시 유보하고 그는 찾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 나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직선적으로 말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한 것은 식민지시대의 윤동주였다. 황학주 역시 독거의 바닷가 집에 앉아 매일 종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실체를 찾으려 한다. 종이 거울은 햇살에 바래기는 해도 구리거울처럼 녹이 슬지도 않고 유리 거울처럼 깨지지도 않는다. 생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종이 거울은 형태를 버리지 않고 거울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난항의 여로를 거쳐 가면서 황학주는 종이 거울에서 자신의 실체를 찾기 위한 고행을 이어갈 것을 생각한다. 독거의 낡은 행성 안에서.

 

 

어쩜 사막만을 태우고 달리는 기차

고삐를 놓치지 않는 한 실컷 달린다

재즈 그룹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는 파란 모자도 있다

당장 배가 고파 발자국도 없이 가출한

석회 냄새나는 바람이 들어왔다 걸어 나간다

얼굴이 얼마나 검은가 물으면 검은콩처럼 검다고 할

제일 안 팔리는 여인을 꽁무니에 달고

타자라 기차는 달린다

전기 없는 기차가 별들의 명암을 전하며

밤을 새워 달린다

아침이 돼보면 알겠지만

해가 뜨지 않는 창도 여러 개 붙이고

지평선 백량을 달고 가는 기차

내일 안으로는 도착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다

깨진 유리병에 꽂힌 여인은 종종 입술을 깨물고

식은땀을 검은색 꽃잎처럼 흘려야 한다 아기가 잠든 밤

모독하듯이, 넓고

오독하듯이, 길게

지구는 돌고

이방인을 꿈꾸는 사람들만 태어나는 지점을

기차는 말 못하는 사정들의 연기를 품고서 달린다

물이 마른 신전들 주술이 끊긴 마을들과 회오리바람 수십 개를 태운

사막

그중 아무 소리 없이 철분 냄새 나는 사막을

이 밤 안으로 마침내 누가 또 떠나가나

오래 바라보는 것으로 연애인 사막은

한없이 情死가 많다

-情死전문

 

 

타자라 기차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연결하는 열차로 꼬박 23일을 달린다고 한다. 한없이 이어진 사막을 달리니 정말로 사막만을 태우고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그 기차가 실제로 태운 것도 사막의 일부이고 사막 같은 삶일 것이다. “당장 배가 고파 발자국도 없이 가출한검은 피부의 난민들이 있고 제일 안 팔리는 여인도 꽁무니에 매달려 있다. 아기에게 젖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허기진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식은땀을 흘린다. 이 처연한 풍경을 모른 체하고 지구는 모독과 오독의 자세로 넓고 길게 돈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검은 사막을 달리는 기차는 흡사 죽음의 전령사 같다. 희망의 신화가 사라진 마을 저편 사막의 어두운 공기 속에 죽음의 혼령이 다가서고 길을 잃은 누군가는 철분 냄새 나는 사막 저편에 마지막 숨을 거둔다. 사막에서 할 일이라고는 오래 바라보는 일뿐이며 그 바라보는 연애의 끝판에는 죽음이라는 정사가 있다.

 

이처럼 황학주는 아프리카의 비극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언어의 미학을 빚어내려 노력한다. 이것은 그의 미학주의의 관성이 지속적으로 생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천성의 고독 속에서 독거의 몸부림으로 그는 미학주의의 심연을 파헤친다. 자신의 생에 대한 성찰이건 가슴 아픈 연애에 대한 상념이건 삶의 비극적 국면에 대한 연민이건 그의 천성에 도사리고 있는 미학주의의 촉수는 미다스의 손처럼 모든 대상을 몽롱한 심미적 영상으로 변환시킨다. 그리하여 그 몽롱한 아름다움은 지금껏 누구도 성취하지 못한 애매성의 미학을 창조한다. 그 때문에 그의 시는 몽롱한 성채의 우울한 독거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크고 작은 세상의 변화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의 구원은 오직 시의 자력에 있을 뿐이다. 그 자력이 유독한 해악을 가한다 하더라도 고독의 성채에 칩거한 시의 사제는 시가 주는 위안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설사 시의 칼날에 가슴이 베인다 해도 그 황홀한 몽상의 매혹이 있으므로 고독한 시의 유미주의자에게 미련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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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 서울여대 교수)

1955년 서울에서 출생. 문학 박사. 문학 평론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와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저서로는 『백석을 만나다』,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김기림』, 『노천명』, 『세속의 성전』, 『감성의 파문』, 『폐허 속의 축복』,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 등이 있음. 충남대와 한림대 교수 역임.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김환태평론상, 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출처 : 대구 문학 - 시야 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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