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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건호]나의 詩 이렇게 쓴다/오로라역의 별리

문근영 2014. 1. 15. 08:40

나의 詩 이렇게 쓴다

 

오로라역의 별리

 

전 건 호

(시인)

 

겨드랑이에 깃들어 잠들던 새들은 아침이 되자 각자 제 갈 길로 떠나 버렸다. 개망초마저 내게 눈 마주치지 않으려는 이 별은 아무래도 내 별이 아닌 거 같다. 잘못 불시착한 게 틀림없다. 시간의 강물은 왼발과 오른발 사이로 쉴 새 없이 흐르고 발끝이 향하는 각도에 따라 주변 풍경은 아마존이 되고 사막이 되어 길을 막기도 한다. 말 한 번 못 건네고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 어느 창문 안에 촛불 밝히고 행복할까?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은 주마등 같았으나 어느 곳 하나 마음 줄 곳이 없었으니 내가 지나온 자리마다 황망하게 떨어져 우는 발자국들, 이젠 가던 길 되돌아가 품에 안아 주고 싶다.

 

지난 일억 년 동안 찍어 놓은

발자국을 찾습니다

내 손 놓치고

낯선 땅 떨어져 헤매고 있을 발자국들

이제야 찾아 나서는데

걸어온 길 가늠할 길 없습니다

철없이 오지랖 넓히다

저잣거리 손 놓쳐 버린 피붙이들과

지난 생 내 가슴 모질게 대못만 박다

이제는 내가 잠든 방 벽 타고 올라

창문 두드리는 담쟁이

모두 다독여 거두려는데

지나온 길

윤회의 담장 뛰어넘어

달의 뒤편까지 끝이 없습니다

문득 고개 돌려 보면

내 살 내음 더듬어

따라붙는 연어 떼

눈에 밟혀 더 나갈 수 없습니다

혹시 낯선 땅 지나다

울고 헤매는 발자국 보거들랑

바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 두둑이 하겠습니다

―「현상 수배」

 

꽃들은 왜 나에게만 눈 맞춰 주지 않을까? 골목길에 도열한 가게마다 낚싯바늘 같은 눈초리들이 쳐다본다. 저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눅눅한 불빛들이 손을 뻗어 어깨를 잡는다. 텅 빈 방 안에 고단한 등을 붙이면 빙빙 도는 천장에서 지구의 자전을 느낀다. 온종일 기척도 없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길을 잃은 스팸 문자들만 불시착하고 창밖에는 나를 들여다보던 어린 별 하나가 또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다.

 

나는

오늘도 잘못 배달되는 것 같다

―「문자 메시지」

 

길을 묻던 사람의 목소리를 꺾꽂이해 화분에 심는다. 어린 가지는 무럭무럭 자라 방 안을 덮어만 가고 나는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몸을 뒤척인다. 유리창을 후려치는 자동차 불빛에 젖은 넝쿨들은 꽃을 피우고 이슬비처럼 촉촉한 달빛에 젖은 말들은 허공의 바람과 살을 섞는다. 입술을 벗어나는 순간 시공을 넘나드는 카멜레온이 되어 나를 현혹한다.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풀벌레 울음은 텅 빈 방을 가득 채우고 나는 심연 속 물고기가 된다. 저 수면 밖 누가 나의 부재를 알기나 할까?

나의 부재를 모르는 지상의 벗들이 술에 취해 어둠을 배회하는 동안 나는 남쪽 바닷가 빈방에 홀로 누워 악몽을 꾼다. 아래층 둘둘치킨에서 피어오르는 닭 튀기는 냄새가 나를 프라이하는 밤, 식은땀 흘리면서 구조를 타전할 별을 찾지만 칠흑 같은 어둠이 천막을 친다.

 

텅 빈 자취방에 들어오니

사육하는 머리칼이 누에처럼 엎드려 있다

풀썩 누운 내 등을 갉아먹는 소리

사각사각 비가 내린다

창살에 달라붙은 빗방울

창문 틈 기웃거리는데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코를 곤다

쓸쓸한 통통배 시동을 거는

등대도 없고 별마저 없는 밤

뱃전을 예리하게 난도질하는 파도에 놀라

갑판을 구르며 식은땀 흘린다

하느님 제게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열아흐레 하늘

하얀 반달 바이킹의 해적선이 자꾸만 따라와요

비바람 덜컹대는 창 틈

나를 삼키려 매달리는 빗물에

흐물흐물 환형동물이 되어 떠내려간다

내일이 아내의 생일인데

전화선 타고 달려오는 막내 어깨 흔들어 깨우는데

축축이 젖어 버리는 몸 으스스 밀려오는 한기

창문 어렴풋이 밝아 오고

방바닥에 머리칼 우수수 부화한다

―「블랙데이」

 

지난 어느 가을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남쪽 바닷가로 발령이 났다. 비정한 직장을 원망하며 사표를 던지는 걸 고민했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이불 보따리를 싸 들고 진눈깨비 내리는 대진고속도로를 따라 유배 아닌 유배의 길을 떠났다.

차가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하나 둘 끊어지는 라디오 전파들, 빙판이 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하염없이 내리던 눈발은 이윽고 내가 지나온 길마저 흔적 없이 지웠다.

 

유성에 흘러들어

금성장 화성장 수성장

인공위성이 되어 착륙 지점을 찾는다

어지러운 공전 궤도를 떠돌다

십이지장 같은 골목 끝에서

하루의 마침표를 찍고

혜성장에 등을 붙인다

숨 넘어가는 별들의 교성

달력 속 여자가 몸을 비튼다

그녀 품에 안겨 꿈속을 헤매다

벽지에 만발한 도화 속으로 흘러간다

질펀한 춘화 속으로

뭇 발자국들 비틀비틀 걸어 들어와 코를 곤다

거친 숨소리에 몸 뒤척이다 보면

실눈 뜬 여인 손을 내밀고

길 잃은 꽃잎에 파묻혀 몽정을 한다

빛바랜 벽지에 잠들었던 낙서들

다족류의 지네가 되어

스멀스멀 허벅지에 기어오르는데 놀라

화들짝 눈을 뜬다

흐릿한 창문엔

미풍을 타고 수시로 흩어졌다 모이는 꽃별들

처녀좌의 치마를 들추다

화르르 낙화하는 유성이 된다

―「떠돌이별」

 

한 생을 산다는 게 무엇인가? 어스름에 도착한 남쪽 바닷가 도시는 아직 가을색이 완연했다. 은행잎 덮인 아스팔트를 따라 후미진 변두리 단칸방에 이불 보따리를 풀고 텅 빈 방에 누우니 겨울비가 창문을 후두둑 쳤다. 내가 왜 여기에 홀로 누워 있는 걸까? 내가 궁지에 몰리자 어느 누구 하나 전화 한 통 없었다.

 

원반 같은 운동장 이 악물고 뱅뱅 돌다가 숨 가빠 그만 멈추려는데 두 다리가 제멋대로 뱅글거리는 거라 힘들어 죽겠는데 멈춰지지 않는 거라 내가 달리는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운동장이 멋대로 나를 굴리는 거라 공깃돌처럼 톡톡 튕기는 거라 하도 기막히고 어이없어 가쁜 숨 할딱이며 생각해 보니 여기까지 온 게 내 의지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거라 바람이 이리저리 나를 이끌었고 길들이 나를 둘둘 말아 꾸역꾸역 소화시켰던 거라 알지 못하는 힘이 나를 원반 속에 밀어 넣은 거라 누군가 공깃돌처럼 나를 굴리며 즐기고 있는 거라 평생 쳇바퀴 돌고 돌면서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한 거라 이제야 그걸 깨닫고 트랙을 뱅뱅거리면서 담장 밖 흘겨보며 씩씩거리는데도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멈출 수가 없는 거라

―「거라」

 

홀로 떨어져 산다는 것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낯선 거리를 지나 홀로 빈방에 돌아와 식은 밥을 먹다 보면 거리를 적시던 무심한 꽃비가 창문에 매달려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지금도 가슴 시린 것은

내일 또 만날 것으로 알고

손 한 번 못 흔들고 헤어진 사람

다시 찾을 줄 알고

낙서 한 줄 못 남기고 떠나온 담벼락이다

붉어진 얼굴로나마

고백이라도 해 보았으면

붙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

세월 지나 낯선 거리

사내아이 손잡고 지나치는

뒷모습도 황망하지만

지나온 길모퉁이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고백하지 못한

까맣게 많은 말들 무서리에 덮이고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처마 밑 제비 되어 찾아와

여름내 흙집 짓고 울다 떠난 인연 아닌 인연을

화들짝 깨닫고 바라보는 빈 제비 집

삭풍에 기타줄처럼 떠는 거미줄

그 어수선한 공명에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다

―「때늦은 후회」

 

무한한 시공 속 내가 머문 시간과 공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걸까? 지나간 달력 어느 칸에서 내가 행복했던가? 다시 달력의 뒷면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못다 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대와 눈 한번 마주치는 게 금생의 인연이란 걸 받아들이는 지금 창문 기어올라 손짓하는 담쟁이는 얼마나 제 몸을 붉게 태우다 낙엽으로 저물어 갔을까?

 

담쟁이와 눈 마주쳤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이닥칠 기세다

금이 간 벽 통째로 감아 돌며 올라와

창문 들여다보며 손짓을 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콘크리트 틈 뿌리 내리고

백 년을 기어올랐구나

 

아, 내가 이 집에 눕기 전부터

네 영혼의 집이었구나

 

내가 누워 잠든 사이

백 년을 기어올라

걸어 잠근 방 안을

애타게 들여다보았구나

바람에 찢긴 파란 손바닥

가늘게 흔들며

―「영혼의 집」

 

이 광활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만난 그대와 눈길 한 번 제대로 못 맞추고 또 헤어져야 하는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 수 있을까? 부디 떠나온 별에서 간발의 차이로 헤어진 그대와 꿈속에서라도 눈 한 번 마주칠 수 있다면 금생의 슬픔 또한 곡진하게 떨어지는 꽃잎처럼 아름답지 않겠는가?

 

백야를 달리던 기차가

잠에 취한 자작나무 숲을 관통한다

아라한의 호각 소리에 오로라역에서 급정거를 하자

다끼니들 올라 표를 나누어 준다

극과 극으로 멀어지는 행선지

바빌론 로마 신라로 이별하는 기차는 눈물의 바다

살 부비던 당신과 나는

시공이 엇갈리는 열차로 각각 갈아타야 한다

역을 감싸 도는 검푸른 강물 위로

안개 속 사라지는 팔만 개의 철교

플랫폼은 타임머신들의 시동에 놀란

별들이 뿌리는 유성우에 젖는다

낙랑에서 온 당신과 무색계에서 불시착한 나도 이젠 이별이다

지구별의 유배가 풀려 떠나온 별로 돌아가는 길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금생과 내생의 경계를 따라 빛의 강물을 범람시킨다

낯선 지구별 불시착해 뭇별만 헤아리다

막상 아스라한 시공으로 회귀하려는데 잡은 손 놓을 수 없다

승객들 하나 둘 빛 속으로 멀어지고

이젠 우리도 손을 놓아야 할 시간

범람하는 빛의 중심부

자작나무들 어깨 들썩이며 머리를 푼다

―「오로라역의 별리」

 

부디 지금 내가 쓰는 시가 그대와 나 사이 지독하게 꼬인 윤회의 뒤안길, 발목을 잡아 온 가시덤불에 환한 꽃으로 숭얼숭얼 피어나 유계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길 빌고 또 비는 이 시간, 창밖에는 또 눈이 내린다.

 

 

-출처 : 詩하늘 65호(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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