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의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평설 / 박남희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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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라는 시간은 일상적으로 하루의 말미에 있는 어두워지는 시간을 지칭하지만, 그 의미를 확장해서 보면 인생의 끝인 노년을 상징하기도 하고, 순환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새 출발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저녁이 되어야 비로소 날갯짓을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녁은 죽음이나 소멸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녁은 화사한 햇빛이 비추던 낮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낮에는 햇빛이 눈부시고 마음이 너무 분주해 보이지 않던 것들도 저녁에는 보이기 시작한다. 저녁은 우리에게 어딘가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저녁 시간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시간인 셈이다.
고영민 시인의「저녁에 이야기 하는 것들」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인식방법으로 우리에게 저녁이라는 시간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로 시작되는 첫 구절은 이러한 인식의 출발점이다. ‘사랑’을 생각하면 막연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것이 관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뚜렷한 감각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사물로도 인식된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저녁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인은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면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을 발견한다. 그것은 나무가 온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저녁이라는 시간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시인은 500년을 넘게 사는 나무를 보면서 지금까지 간과해오던 노년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하는데, 시인은 이토록 오래 사는 것이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나무의 늙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늙음에 귀결되어 저녁이라는 시간을 새롭게 환기시켜 준다. 노년에 이르면 인간은 가는귀가 먹게 되고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우게 된다.
그런데 이 시는 후반부에 이르러 고목이나 노인의 이야기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라는 대목은 고목이 단순히 노인의 은유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다른 의미로 확장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나무’와 ‘노인’의 이미지를 ‘너’ 또는 ‘나’의 차원으로까지 확장해서 바라봄으로써 무관심의 영역이었던 노년을 주체화된 인식의 차원으로 전경화해서 보여준다. 즉 고목은 단순히 타자가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서의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노년으로 상징되는 고목의 인격화된 주체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는 시인의 진술은 ‘참았던 울음소리’로 대변되는 나무의 주체성이 인격화되어 드러나는 대목이다.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저녁이나 노년의 시간이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이라는 것과 관계된다. 이 시에 의하면 아마도 인격화된 나무의 주체성과 만나는 사람만이 나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의 주체성을 인격화해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이라는 관념을 사물로 생생하게 읽어내고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시산맥』(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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