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4) - 웃음의 미학
고추농사 뭐 별게 있나
허림
내 생전 첨 본다니
증말 가랑이 확 찌저지게 달렸드라구
농사란 게 사내놈들이 짓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 지지배 고추밭 보구는 속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니
츰에는 좆맛도 모르는 간내이가 뭔 농사를 저어 혀찼는디
부대낄쪽마다 생글생글 웃으며
거름은 은제 줘야 해유
첫물은 은제 따 줘유 묻는데
빈둥 건둥 내 고추나 받으라고
구래이 같은 속내를 내보이고 싶더만
내깐에 가끔씩 막걸래 사발이나 받아먹고
건성건성 일러줬는디 말대루 증말
짚이 갈고 뭔 뒘이랑 망우를 퍼다 뿌리는지
온 동네가 진동한 게 요 며칠 전인디
정게는 그 밭떼기에 동네 할머이들 열다섯이나 들러붙어
백 마흔 시박시를 땄다나 하더라구
어끄적께는 신새벽에 일어나 그 밭둑서리를 걷는디
또 한번 놀랐다니
저 위 밭둑서리에 웬 여자가 앉아
뒤를 보는지 뭐하는지 모르 것는디
암튼 뭐를 봤는지 고추가 불끈불끈 심을 쓰더니
또 가랑이가 찌저지게 주렁주렁 매달리더라구
그려 정작 고추농사만큼은 여자가 져야하는 같야
새내들이 주물러 봐야 그려
아침저녁으로 예편네를 올려 보내
치마만 몇 번 걷어올렸다 내리면
지들이라구 벨 수 있어
커질대루 커져 용 쓰것지
# 이 시는 살아 움직이는 삶의 풍경을 해학적 시선으로 읽어내는 역동적인 작품이다. 텍스트 안에는 웃음이 있고, 진솔한 서정이 있고, 대상을 희화화 시키는 능청과 여유도 있다. 얼핏 김유정의 해학과 친연적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강원도 특유의 정서가 잘 녹아있는 시다.
이 시는 유희 정신에 기초하여 엄숙주의의 뒤통수를 치며 경쾌하게 치고 빠지는 말놀림으로 읽는 내내 즐거움과 웃음을 준다. 웃음은 기존의 사유 체계나 관습적 질서와 제도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본래 웃음은 경건주의나 독단주의로부터의 일탈로 강제, 금지, 제한, 권위 등을 조롱하거나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진지함과 엄숙함이 진리의 모습이고 웃음은 무질서, 경박함의 모습으로 단정한 적이 있었다. 과거의 기독교 문화에서도 웃음은 단지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관습적이고 획일화된 질서가 균열되는 순간 발생하는 웃음은 일상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존재의 해방감을 갖게 한다.
이 시는 농촌의 사내를 화자로 내세워 고추 농사를 짓는 처녀 이야기로 시작한다. 화자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 아이가 고추 농사를 짓는 걸 같잖게 생각하지만 처음 고추 농사를 시작한 처녀는 사내에게 고추 재배법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러나 화자는 여전히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서 ‘구래이 같은 속내’를 내보이려고 한다. 여기서 ‘고추’는 남성의 성기로 슬쩍 자리바꿈을 하며 웃음의 통로를 마련한다. 그런 화자의 속내도 모르고 처녀는 사내에게 막걸리 대접을 하며 계속 농사 짓는 법을 묻는다. 사내가 일러준 방법대로 처녀는 착실하게 고추 농사를 짓고 ‘백 마흔 시박시’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이를 보고 크게 놀란 화자는 또 한번 놀라게 되는 정황을 목격하게 된다. 한 여자가 밭둑에 앉아 뒤를 보는 장면을 보는 순간 ‘고추가 불끈불끈 심을 쓰더니 / 또 가랑이가 찌저지게 주렁주렁 매달리’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의 고추는 사내의 욕망의 발현이고, 음양의 충돌이 빚어내는 붉은 불꽃이다. 그러나 화자는 짐짓 아닌 척 ‘고추농사만큼은 여자가 져야하는 같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새내들이 주물러 봐야 그려
아침저녁으로 예편네를 올려 보내
치마만 몇 번 걷어올렸다 내리면
지들이라구 벨 수 있어
커질대루 커져 용 쓰것지
이처럼 능숙한 강원도 사투리의 구사가 농밀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면서 시적 감흥을 유발한다. 「고추 농사 뭐 별게 있나」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해학의 시로만 한정한다면 이 시는 좀 억울할 것이다. 설득력 있게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시상의 마무리와 구조도 일품이지만 시 속에 내재되어 있는 원형적 심상들이 내뿜는 광휘도 눈부시다.
또한 이 시에는 단순히 웃음의 미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적 상상력을 모티브로 하여 대지의 모성과 여성성, 생산과 풍요의 시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처녀)-자연으로 대체된 남성-땅은 합일의 궁극을 지향한다. 그 정점에 ‘고추’가 자리하고 있으며 풍요로운 결실의 텃밭과 자양분은 ‘처녀’의 건강한 삶의 동력에서 비롯된다. 토지와 모태, 여성과 밭고랑, 경작과 생식 행위의 동일시가 가장 조화롭게 구현된 시가 「고추 농사 뭐 별게 있나」이다.
여유와 웃음이 넘치는 역동적인 시 한 편이 새로운 삶의 진경을 보여주었다. 난삽과 난해의 도가니에 갇힌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이 시의 건강성은 더욱 확연해진다. 삶도 사유도 없고 다만 언어의 조립품으로서만 기능하는 시들이 ‘원시적 근원’을 되짚어보게 하는 이 시의 육체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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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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