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평설 / 이경수
민달팽이처럼 느리게, 지난 시절을 애도하는 하나의 형식
이경수
내게는 아직도 꿈에 가끔 보이는 고향집이 하나 있다. 어려서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내 꿈속을 찾아드는 고향집은 단 한 곳뿐이었다. 여섯 살 이후 정착해 고등학교 2학년 초반까지 살았던 대전의 고향집은 아버지가 손수 가꾼 작은 화단과 장독대, 창고와 다락방과 옥상이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유년 시절의 일부를 보냈고 꿈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또래들과 어울려 숨바꼭질을 할 때면 숨을 데가 많았던 그곳에서 술래가 찾을 때까지 두근거리며 숨죽이던 일, 다락방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젊은 시절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몰래 아껴가며 훔쳐보던 일, 다락방 작은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빛살과 먼지의 띠, 창고든 다락이든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숨어드는 것을 좋아하던 일 등등. 고향집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둘씩 솟아오르는 기억들이다. 10년쯤 전에 고향집이 생각나 한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문이 잠겨 있어서 바깥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2층을 올리고 집도 개조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중한 기억을 도둑맞은 듯한 이상한 상실감에 며칠간 사로잡혀 있었다.
진은영의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를 읽고 난 밤, 오랜만에 꿈에 고향집이 다시 찾아왔다. 그 시절과 이별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애도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나 보다. 진은영의 시는 ‘당신’이라는 2인칭의 형식으로 화자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소환한다. ‘당신의 고향집’은 곧 당신을 통해 소환한 화자의 고향집이 된다. 당신의 꿈과 나의 기억, 당신의 고향집과 나의 고향집은 서로 섞여든다. 시인은 ‘나’의 고향집이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의 고향집이라고 부름으로써 고향집과 유년 시절에 대한 애도의 거리를 확보한다.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에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당신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차림으로 창문 너머의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콜을 태운 젖은 재들이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 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나간 문고리와 골목길과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도둑고양이, 모든 울음들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들,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전문
화자가 통과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고향집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문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화자가 풀어놓은 달팽이들은 ‘잠든 당신’의 꿈속을 느리게 기어 다니며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술집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을 보여준다.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기억도,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떡갈나무 아래”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기억도 솟아오른다. 화자의 고백은 “얇은 잠옷차림으로 창문 너머의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이어진다. 그 고백의 뒤로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리고 “별과 알콜을 태운 젖은 재들이 휘날”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시각과 촉각과 후각이 어우러져 풍경에 깊이를 부여한다.
이미 놓쳐버린 지난 시절의 초록의 봄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생명을 지닌 것들의 모든 울음들과 그런 모든 것이 있었던 마을 전체가 화자의 요청에 의해 소환된다. 마치 주술처럼. 저 주술의 힘으로 우리가 저마다 상실했던 과거의 기억들도 불려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잃어버린 저 시간들을 충분히 슬퍼하지도, 오래 애도하지도 못했다. 슬픔의 심연에 다다르지 못했으니 애도의 시간 또한 마련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가 소환하는 지난 시절의 기억이란 “다리 잘린 그들의/기다란 목과/두 팔”처럼 불구의 것이거나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빛깔로 뒤덮인 것일지 모른다. 화자는 그 기억의 파편들 위로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들과 달리 집이 없는 민달팽이들은 집을 잃어버린 존재들,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을 비유한다. 기억의 파편 위를 기어 다니는 저 민달팽이들의 느린 걸음은 당신을 향한 화자의 사랑의 고백이자 지난 시절에 대한 애도의 형식이다. 시인이 빚어낸 아름다운 음악과 회화의 언어가 당신(들)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작은’ 나, 당신(들)은 안녕한가. 사랑의 민달팽이들이 기어 다니는 당신(들)의 꿈속은 어떠한가.
————
이경수 / 문학평론가. 중앙대 국문과 교수. 주요 저서 『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 『불온한 상상의 축제』 『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 『춤추는 그림자』 등.
—《웹진 문지》주간문학리뷰 201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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