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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6) - 결핍의 서사

문근영 2013. 12. 6. 13:51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6) - 결핍의 서사

 

 

 

프리사이즈(free size)
 
김원경
 
 
외로워 수증기처럼 내가 희미해져갈 때
저려오는 손과 발을 꾹꾹 누르면서
나는 내 핏속 어디쯤 떠돌고 있는 당신을
자주 꺼내 입는다
 
당신은 어느 고대 악사가 내뿜었던 어떤
입김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납작한 몸이었다가
동그랗게 부푼 몸이었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몸이었다가
오래 전부터 이곳을 떠도는 몸이었다가
 
기억은 착용감이 좋은 잔영을 오랫동안 껴입고 싶어서
푸른 불면이 되어 당신의 창으로 지금 헤엄쳐 가고 있다
 
불면은 동그란 잠 위에 동그란 눈을 포개어
꿈을 깨우는 의식과 악수하기 위해
일일이 혈관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럴 때 너무 쉽게 계면(界面)을 뛰어 넘어
 
코끼리를 삼켜버린 보아뱀처럼
당신 안에서 무성하게 번식하는
당신 안의 당신이 낮과 밤으로 뒤엉켜
모든 것을 삼켜버릴 태세로
 
이목구비가 분명한 당신이었다가
옷장 안 나프탈렌처럼 점점 사라지는 당신이었다가
 
메뉴판 앞에서 주저하는 당신이 하나 둘 모여드는데
황홀한 식사 앞에서 나는 계속 멀미를 하고
 
외로워 수증기처럼 내가 말라갈 때
요절한 영원처럼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근거림을 간직하고 있다
 
 
# 비평에 의지하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때 독자는 비교적 자유롭게 텍스트 안을 유영하면서 나름대로의 감상의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은 평자에 의해 단정되거나 규정된 작품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돌을 빵이라고 해도 비평적 판단을 우선시하고 주체를 작품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그릇된 시읽기의 사례를 종종 목격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평의 한계를 노출하는 손발이 꼬인 평문처럼 생물을 토막 내는 섣부른 비평은 작품에 대한 폭력일 수가 있다.

 이 시는 “당신”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다. 한때 함께했던 대상으로부터 격절된 화자는 “외로움”과 싸우면서 과거의 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내 핏속 어디쯤 떠돌고 있는 당신을” 다시 감각하기 위해 핏속에서 대상을 “꺼내 입는” 행위는 추억을 반추하면서 떠난 존재를 화자의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그만큼 대상이 “나”의 몸에 각인한 화인은 뜨겁고 또렷하다. 존재의 전영역을 흔들고 간 해일 같았던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없다. 그러나 화자는 대상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추억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납작해졌다가 부풀었다가 대책없는 그리움으로 “떠도는 몸”인 화자는 “푸른 불면이 되어 당신의 창으로 지금 헤엄쳐 가고 있”는 중이다. 결국 “나”의 불면은 “당신”에게 가닿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계면(界面)을 뛰어 넘어” 화자가 내면 속에서 상면하는 대상은 “코끼리를 삼켜버린 보아뱀” 같은 존재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태세”로 다가오는 대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행위의 주체는 기실은 “나”이다. 이미 당신은 내 곁에 없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유령 같은 존재일 뿐 욕망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화자의 욕망이 “당신”에게 빙의되어 나타난 것이다.

 화자는 내면 속에서 들끓는 “당신”을 양면적으로 체험한다. 수시로 출몰하며 현상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분명한 당신”이었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당신”이 되기도 한다. 기억 속을 들락거리는 “당신”과 함께했던 “황홀한 식사”를 떠올리며 화자는 다시 견디기 힘든 존재의 “멀미”를 한다. 대상을 복수화하여 추억 속에서 무한 번식하는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면서 “외로워 수증기처럼” 말라가는 화자는 지난 사랑을 “요절한 영원”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화자가 마지막으로 끌어안는 것은 “두근거림”이라는 정서적 반응이다. 눈앞에서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두근거림”은 지속되는 사랑의 표현이며 끝나지 않는 “당신”에 대한 곡진한 감각이다. 그 감각은 내면에서 프리사이즈로 떠돌고 있는 “당신”을 향한 뜨거운 몸의 언어이다.

  격절과 절연은 또 하나의 결핍이다. 좌절된 욕망과 결핍의 서사가 일구어낸 한 편의 젊은 시가 오랫동안 곁을 떠나지 않는다. 돌아보시라. 이 무더위 속에서도 누군가 “착용감이 좋은” 당신을 껴입고 다닐지 모른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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