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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64) 유안진 〈꿈 밖이 무한〉

문근영 2013. 11. 19. 09:09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64) 유안진 〈꿈 밖이 무한〉
늦가을의 생명 예찬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풀밭에 흩어진 감나무 잎새 옆에
  익은 알감도 한 개 떨어져 있다
  돌아서니 노란 모과도 두 알이나 던져져 있다
 
  후진 뜰이 환하다 정겹다
 
  그려도 그림이고 지워도 그림이듯이
  삶도 꿈 몇에 갇힐 수는 없지
  꿈 밖의 무한이 더 꿈이고
  삶 밖의 죽음이 더 삶이라는 듯이.

  
  
  계절은 늦가을, 추분 지난 뒤 낮은 짧아지고 밤은 길어진다. 우리는 어둠과 더 친해져야 한다. 늦가을은 곧 서리와 초빙(初氷)과 북풍의 소식을 전해줄 것이다.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기보다는 이미 시작했던 모험들도 철회해야만 하는 계절이다. 산 것들을 감싸고 있는 삶이라는 껍질을 탈각하고 나면 산 것들은 죽음이라는 단단한 씨앗으로 남겨질 것이다. 세계를 뒤덮는 길고 긴 어둠은 새로운 계절이 도래했다는 표상이다. 늦가을은 임종과 어둠의 때다. 일찍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이 세계에 도래한 밤의 시대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 “신들과 신이 멀리 물러나게 될 뿐만 아니라, 신성의 빛이 세계사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밤의 시대는 궁핍한 시대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더욱더 궁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이미 너무도 궁핍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신의 결여를 결여로서 감지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밤의 시대는 신과 초월적인 것들의 세계에 대한 결여로 인해 도래한다. 이 결여와 더불어 “이 세계에는 근거 짓는 근거로서의 근거가 사라”(하이데거, 앞의 책)진 것이다. 필경 밤은 궁핍한 시대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대뜸 늦가을의 “후진 뜰”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감나무 잎새” “익은 알감” “노란 모과”가 떨어져 있다. 가을의 자연이 내놓은 물산(物産)들이다. 이것들이 흩어지고, 떨어지고, 던져져 있는 것은 곧 생명의 유기적 관계의 권역 안에서 일탈해가는 존재의 양태에 관한 감각적 실감을 보여주는 묘사다. 존재의 무르익음과 더불어 시작되는 조락과 낙과는 도래하는 죽음의 표상이다. 이것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경 소멸한다는 진리 속에서 관찰되는 자연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락과 낙과를 겪으며 욕망의 모험을 끝낸 이것들은 썩고 그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 알감과 모과는 씨앗을 남겨 언젠가 싹을 틔울 것이다. 씨앗에서 싹이 돋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의 광맥이라는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죽음의 전조(前兆)이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예고한다. 삶이 품은 죽음, 혹은 죽음이 끌어안은 삶이다. 개체는 죽지만 종은 생명을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 뜰”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물리적 존재의 세계인데, 시인은 이곳이 “환하다 정겹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는 왜 환한가. “후진 뜰”에 떨어진 “감나무 잎새” “익은 알감” “노란 모과”에는 아직 생명의 빛이 남아 있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먹힐 것이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렇듯 살아 있는 것들은 다른 것들의 가없는 희생을 통해 생존을 잇고 번성한다. 몸이 분자들의 일시 배열이라면, 생명은 생화학적으로 활성화된 분자의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외부에서 끊임없이 단백질을 조달해야 하고, 몸이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체내의 분자역학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만일 외부에서의 물질과 에너지 조달이 끊긴다면 생명체는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의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잇고 번성한다는 점에서 자연은 다양한 포식자와 피식자들이 한데 모여 만든 거대한 권력 찬탈의 장이다. “후진 뜰”이 환하게 비친 것은 이것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향연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락과 낙과는 어떤 유기체에게는 죽음이지만 다른 유기체에게 그것은 생명의 연장과 번성에 필요한 기회다.
 
  시인은 꿈에 갇힌 삶과 꿈 밖의 무한, 그리고 삶 밖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삶을 가둔 꿈은 우연과 무상성(無償性) 때문에 덧없다. 가둔다는 점에서 삶의 확장성을 제한한다. 단단한 씨앗의 껍질을 꿰뚫고 싹이 돋아나듯 꿈을 깨고 꿈 너머로 나아가는 삶이 진짜 삶이다. 그다음은 “꿈 밖의 무한”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밖에 초월론적 실재의 세계가 있다는 암시일까. 이것은 “삶 밖의 죽음”이 삶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삶의 플러스로서 “더 삶”이라는 생각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삶이라는 상상력은 그 물리적인 생명 너머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연다. 꿈에 갇힌 삶은 꿈 밖의 무한을 모르는 삶이고, 삶 밖의 죽음은 삶보다 더 삶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이란 단지 “고독하고 비참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 그 무엇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삶 너머의 삶, 꿈 밖의 무한을 내다본 시인은 죽음마저도 초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미 “죽음보다 더 죽음 되는 것이 살아내는 것”(〈피뢰침, 죽을힘으로 산다〉)이란 사유에 가 닿는다. 이런 사유의 바탕 속에서 생명의 열린 장 안에서 죽음도 삶의 일부로써 끌어안는 긍정주의가 생겨난다. 죽음도 삶의 권역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삶이 아닌 삶도/죽음보다 더한 죽음 이상도/또한 삶”(〈피뢰침, 죽을힘으로 산다〉)이라는 확신은 의연하다. 아마도 “퍼붓는 눈발 헤치고 걷어차고/가시넝쿨 가시 끝마다/새빨갛게 익는 찔레 열매, 선혈 얼음이다.”(〈겨울 부활〉)라는 구절에 나오는 눈발 속에서 새빨갛게 익은 “찔레 열매”는 죽음을 인고한 생명의 장엄함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일 것이다. “찔레 열매” 혹은 “선혈 얼음”은 무생명과 무의미의 밤이 도래한 세상을 밝히는 작은 태양이다. 이 작은 태양들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이것이 바로 “몸이 저의 백년감옥에 수감된/영혼에게 바치는 제주(祭酒)”(〈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즉 ‘가시밭길’이고 ‘백년고독’이며, 삶을 넘어선 삶, 꿈 밖의 무한이 보여주는 찬란함이 아닐까.
 
 
  유안진(1941~)은 경상북도 안동 태생이다. 1965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인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아동학과 교수로 있다가 퇴직했다.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세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시인에겐 그것이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근래 들어 시인이 시에 부쩍 치열한 것도 ‘시인’이란 맑은 명예를 되찾으려는 노력일 테다. 시인은 “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는 칠흑 슬픔”(〈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느냐〉)을 받아들인다. 빛에 대한 편애를 넘어서서 어둠을 자발적으로 포용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뿐이랴. “모든 밝음은 어둠에서 태어나고/어떤 어둠에도 빛은 있기 마련이라는/도달할 수 없는 이치”(〈백색 어둠〉)를 넘어서서 “검은 절대주의”(〈검은 에너지를 충전받다〉)를 꿈꾼다. 검은 것은 죽음의 에너지를 품는다. 이것마저 능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어둠의 절대성으로 내면세계를 밝히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때 어둠은 꿈 밖의 무한으로 안내하는 표지다. 어느덧 칠순을 넘긴 시인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초연함과 달관으로 꿋꿋하다.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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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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