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39) 뜨거운 상징의 힘 |
고수부지 언더그라운드
김박은경
맹목이 아닌 적 있니 극단이 아닌 적 있니
부드러운 온몸을 뿔 삼아 직전(直前)마다 뚫는구나, 이 지렁아
오늘 치 소임은 여기까지
강하게 단단하게 한 치 더 키운 스펙을 고쳐 써넣는 일이니
이제 뒤끝 없는 방문을 걸어 잠글 차례
길고 음탕한 시를 읽기 시작이다
그것은 시간의 주름들로 지어졌으니
꿈에라도 다른 꿈 꾼 적 없는 순결한 물방울들의 기록과
흙덩이를 삼키고 낼 뿐인 진저리들의 이력이니
그걸 듣는 오늘의 인형은 착하기도 하지 졸지도 않고
진초록 서클 렌즈에 매달린 눈알을 휘황한 척 켜둔 채
낙타털로 만든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덧칠 하며
푸딩처럼 부드러운 속살을 친절히도 열어 보이니
큰물이나 나야 간신히 잠겨 물맛을 보는 목을 축이는
고수부지 한 뼘 땅바닥으로 어서 기어봐 핥아봐
지렁아, 이 말라비틀어진
이따위 저따위는 되지 않기 위해 전력질주한다 해도
언더그라운드일 뿐이야 그래도 어쩌면 어쩌다
한 판 뒤집히는 순간이 올지 몰라
그날이 오기까지 외로움에 지지 않기 위해
패배감 따위에는 더더욱 지지 않기 위해
일하고 그거하고 일하고 잠잔다, 꿈은
모르겠다
# 김박은경 시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고 조곤조곤 에둘러 말하다가 슬그머니 시의 단도를 들이민다. 앞뒤 박음질이 깔끔하고 조밀할 뿐만 아니라 시의 골조가 품고 있는 사유를 오래 새김질하게 한다. 가볍게 스쳐 지나가면 십중팔구 그의 시는 멀찍이 달아난다. 그러나 입안에 넣고 굴리다보면 그의 시에서는 기이한 향기와 정갈하고 새뜻한 맛이 난다. 우리 시단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매력이다.
시의 주체는 지렁이를 읽는다. 지렁이는 언더그라운드이다. 기존의 방송 매체에 의지하지 않고 거리나 클럽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독립 전사이다. 그들은 “부드러운 온몸을 뿔 삼아 직전(直前)마다 뚫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극단’을 향해 치달리지만 그들에게는 열정과 죽음을 불사하는 저돌적인 생의 몸짓이 있다. 사회적 관습과 가치에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가슴이 가장 큰 무기이다. 또한 그들은 “순결한 물방울들의 기록”과 “진저리들의 이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인형’들 역시 ‘언더그라운드’이다. “진초록 서클 렌즈” “낙타털로 만든 속눈썹” “푸딩처럼 부드러운 속살”이 그들을 대변한다. “큰물이나 나야 간신히 잠겨 물맛을 보는” “고수부지 한 뼘 땅바닥”과 같은 존재들이다. 텍스트의 중간에 삽입된 ‘인형’들의 서사는 시의 비극적 정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3연에서 ‘지렁이’의 지향점이 구체화된다. “이따위 저따위는 되지 않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언더그라운드’는 “한 판 뒤집는 순간”을 꿈꾸면서 산다. “외로움”이나 “패배감” 따위는 던져버린 지 오래이다. 그들의 유일한 생의 목표는 절망과 좌절의 구렁에서 벗어나는 것이 듯 이 작품 역시 비정규직 ‘88만원 세대’의 어두운 초상이며 몸부림이다.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기 위해 하루하루를 신고와 간난 속에 사는 그들은 이 시대 젊은 영혼들의 뼈아픈 현실이다. 그리하여 “꿈은 / 모르겠다”라는 마지막 시적 수사가 통증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생의 도약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마이너리그 ‘지렁이’에 빗대어 형상화한 이 시는 화자의 사상과 감정을 세계에 투사하여 독특한 상상력으로 시적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이처럼 김박은경의 시는 생물로 운동하며 사건화 되고, 감각의 경련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확산되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시의 지점에 도달한다. 그의 탁월한 시 「4월 1일 」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정밀한 시선으로 삶을 성찰하고 새로운 존재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의 헛간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는「고수부지 언더그라운드」가 밝게 빛나는 이유는 독창적 감각의 경험과 뜨거운 상징의 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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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ㅡ 출처 :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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